[광화문에서/박제균]‘아니꼬운 제국’

  • 입력 2006년 7월 29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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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특파원 시절인 2003년, 프랑스 중남부의 로카마두르라는 마을로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다. 한국 여관 크기의 조그만 호텔에 체크인을 하기 위해 프런트 직원에게 프랑스어로 말을 걸었더니 영어로 대답이 돌아왔다. 의아해하며 다시 프랑스어로 얘기했더니 이번에도 영어로 대답했다.

은근히 부아가 났다. ‘내 프랑스어가 별로냐, 네 영어도 별론데….’

계속 프랑스어로 숙박과 저녁식사 예약을 했고, 주변 관광정보까지 물었다. 그 직원도 끝까지 영어로 대답했다. 그야말로 ‘영어와 프랑스어가 객지에서 고생하는’ 어색한 상황이 계속됐다.

저녁 식사 후 그 직원에게서 “보스는 내가 외국인과 영어로 얘기하길 원한다”는 말을 듣고 의문은 풀렸다. 그는 호텔의 ‘영어특기 직원’이었다.

‘프랑스어 보호’를 국가 목표로 내세우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호텔까지 영어특기 직원을 채용할 정도로 세계화의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영어의 공습은 무차별적이다. 그리고 이런 무차별 공습의 배후에는 ‘현대 유일의 제국’인 미국이 도사리고 있다. 영어는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문을 여는 열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2002년 9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방장관 회의. 각국 국방장관들은 미국의 이라크전쟁 준비를 지원하느냐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논란의 와중에도 국방장관들은 하나둘씩 ‘은밀하게(behind the scene)’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을 찾아가 지원을 약속했다. 회의가 끝난 뒤 럼즈펠드 장관은 “만족도가 10점 만점에 9점은 된다”고 흡족해했다.

회의 석상에서는 ‘전쟁 반대’를 떠들다 귓속말로는 ‘전폭 지원’을 말해 줄 수밖에 없는 나라, 이 나라가 ‘현대의 제국’인 미국이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최근 국회에서 “미국이 한다고 다 국제사회의 대의에 맞는지는 따져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노무현 대통령과 한명숙 국무총리의 지원사격이 이어졌다.

이 나라 외교안보 수뇌부가 ‘국제사회의 대의’를 찾고 있으니, ‘나이브’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아니 불안하다고 해야 맞는다.

이라크전이 ‘국제사회의 대의’에 맞는가. 물론 아니다.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위협을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눈을 씻고 봐도 WMD 같은 건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나라가 직간접으로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미국 때문이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대의’를 외치며 전쟁에 반대한 뒤 프랑스는 미국의 전방위적인 보복 위협에 시달렸고, 결국 시라크 대통령의 인기도 추락했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진 이 장관이 이제 와서 ‘국제사회의 대의’를 찾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꼬워도 할 수 없다. 그것이 2006년 한국이 처한 현실이다. 제국을 경영해 본 강대국 중국도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며’ 미국의 북한 압박에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있지 않은가.

국민은 정부가 국제사회에서 ‘대의’가 아닌 ‘국익’을 실현하길 기대한다. 정상에 올라 ‘반미면 어때’라고 외치면 정말 속 시원하겠지만, 그 외침의 반향 때문에 정상 근처에도 못 가본 국민이 사는 저지대엔 수해가 날 지경이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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