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신년회견]‘겉’은 바뀐것 같은데…

  • 입력 2006년 1월 26일 03시 00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25일 신년 기자회견은 이른바 ‘노무현 스타일’과 달랐다.

노 대통령이 그동안 각종 대화와 연설에서 트레이드마크처럼 구사했던 직설적 화법과 공세적 표현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이날 회견에서 각종 현안에 대해 정면 대응하지 않았고 첨예한 이슈에 대해선 즉답을 피했다. 공격적인 이슈는 꺼내지 않았고 가급적 본인의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 사이에서 “너무 밋밋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북한의 위조 달러 지폐 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관여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어서 실무자에게 맡길 것은 실무자에게 맡기겠다”고 했고,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에 대해서도 “해당 기관이나 당정 협의를 통해 합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이제까지 노 대통령의 스타일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2004년 신년회견에선 “열린우리당은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라고 말해 야당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고, 2003년 6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측근 및 친인척의 부동산 관련 의혹에 대해 과한 질문이 나오자 주먹을 불끈 쥐며 “신문에 새카맣게 발라서 뭐가 있는 것처럼 보도해도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한 국무위원은 “국무회의에 가 보면 노 대통령은 진흙탕 밑에 내려와 같이 토론한다”고 했고, 또 다른 전직 국무위원도 “노 대통령은 처음부터 개입해서 논란에 참여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의 ‘변화’에 대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돌출 발언을 최대한 가다듬어 답변한 인상이 역력했다”며 “과거에 지엽적인 문제로 혼란을 초래한 사례가 있었던 점을 감안해 이번엔 철저히 핵심 메시지 전달에만 주력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각종 연설과 기자회견 결과 정작 대통령이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가 ‘돌출 발언’에 묻혀 버린 경우가 많았다는 경험이 노 대통령을 변화시킨 듯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노 대통령은 이날 회견 도중 “기자들이 대통령에게 좀 자극적인 질문을 해서 뭔가 탁 터져 나오는 것을 잡으려고 작정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오늘은 안 넘어갈 것 같다”며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노 대통령이 임기 후반 국정운영 스타일에 변화를 시도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임기 초반엔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정면 돌파’ 스타일이 불가피했지만 임기 후반엔 안정적인 관리형 스타일로 선회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

‘이벤트성 행사’에 혐오감을 보였던 노 대통령이 올해 들어 현장 방문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청와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해서 핵심적인 문제 인식을 버린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野 “정책실패 책임 국민-언론에 전가 여전”

노무현 대통령의 25일 연두기자회견에 대해 한나라당은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지적했고,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은 알맹이가 없다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은 ‘증세 방침 철회’를 문제 삼았다. 열린우리당만은 국정 비전이 망라된 회견이었다고 반겼다.

한나라당 이계진(李季振)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대통령은 부동산정책의 실패 원인을 국민과 야당, 언론 탓으로 돌렸지만 책임은 정부에 있다”며 “증세 입장에서 물러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경제는 이미 주가 널뛰기 등으로 큰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윤건영(尹建永) 수석정책조정위원장도 “노 대통령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를 이해하고 학습하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한나라당의 감세정책과 기초연금제 도입 주장에 대해서도 오해와 무지를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민주당 유종필(柳鍾珌) 대변인은 “증세 감세 논란만 언급한 것은 이 정권 하에서는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가락국수를 시켰는데 맹물 국수가 나온 꼴이다”고 꼬집었다. 국민중심당 이규진(李揆振) 대변인은 “대통령이 증세 감세 논란을 촉발시키는 것은 국가경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沈相정) 의원단 수석부대표는 “빈부격차 개선을 위해 누구에게 세금을 더 걷을지 따져야 하는데 대통령은 1주일 만에 돌아서 결국 용두사미가 됐다. 부유층 앞에서 주춤하는 대통령의 태도는 매우 비겁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전병헌(田炳憲) 대변인은 “양극화 해소 등 국정 전반에 대해 대통령의 구체적 비전과 정책 의지를 소상히 밝혔다”며 “집권 후반기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안정감과 자신감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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