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부형권]외교장관이 칼 빼든 까닭

  • 입력 2004년 11월 9일 18시 35분


“외교통상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이 와중에도 인사 청탁을 위해 나를 만나려는 사람이 있다.”

반기문(潘基文) 외교부 장관은 8일 본부 직원 전원이 참석한 특별 조회에서 이같이 개탄했다고 한다. 김선일씨 피살사건으로 외교부에 비난이 쏟아질 때도 해외출장 중인 반 장관에게 국제전화로 인사 청탁을 한 사람까지 있었다는 후문이다.

반 장관은 이 조회에서 내년 2월 재외공관장 인사 때 ‘배제될 외교관의 기준’을 시시콜콜 설명했다. 한 관계자가 9일 그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대사직까지 개방된 상황에서 인적 쇄신은 시대적 대세다. 정년을 앞둔 고참 선배들이 길을 터주지 않으면 후배들은 진로가 없는 절박한 상황이다. 그러나 누구도 용퇴할 기미가 없어 퇴출 원칙을 상세히 밝힌 것이다.”

이 관계자는 “배(외교부)가 난파 위기에 처했는데도 배 무게를 줄이려고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은 없고, 구명조끼(공관장)를 챙기려는 경쟁만 치열하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정치권에서는 “‘좋은 자리 챙겨 달라’고 민원을 하는 외교관은 많아도, ‘외교부 좀 도와 달라’고 호소하는 외교관은 거의 없더라”는 비아냥거림만 여전히 나돌고 있다.

이처럼 보신주의가 만연하게 된 데에서 자유로울 외교부 간부는 아예 없을 정도다. 그만큼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이 외교부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못해 왔다.

외교적으로 큰 실수를 하거나 외교관의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도 중동이나 아프리카 같은 ‘냉탕 공관’으로 발령 내는 정도로 눈감아주는 게 관행이었다. 외교관과 그 가족에게는 ‘험지(險地) 발령’만큼 더 큰 형벌이 없다는 게 외교부 내의 중론이다. 그러나 그런 논리는 험지 공관에서 묵묵히 일하는 다른 외교관이나 그 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얘기일 뿐이다.

‘외교부 혁신’에 나선 반 장관은 요즘 하루에 몇 번씩 “내가 꼭 ‘칼’을 대야 하느냐”는 고뇌를 토로한다고 외교부 관계자들은 전했다. 반 장관의 그런 인간적인 고뇌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외교부는 창설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부형권 정치부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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