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교수 회고록 “표피적 과거판단은 자기비하를 부를뿐”

  • 입력 2004년 8월 17일 19시 18분


유종호 교수 - 동아일보 자료사진
유종호 교수 - 동아일보 자료사진
‘당대의 기록을 참조하며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표피적 판단으로 과거를 판단하는 것은 과거 이해에도 현재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 남는 것은 겨레의 끝없는 자기비하일 뿐이다.’

한국문학평단의 거장 유종호 연세대 특임교수가 ‘과거’를 화두로 말문을 열었다. 과거 고백이 화두가 된 시점에서 나온 원로의 목소리가 눈길을 끈다.

유 교수는 1940∼49년의 개인 체험을 다룬 저서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에서 자신의 창씨개명 이야기, 광복 전후 상황 등을 들려준다. 생애 첫 회고록을 이런 식으로 펴내게 된 데 대해 “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각자 살아온 시대를 생생하게 증언해서 가까운 과거에 대한 온전한 사회사(社會史) 정립에 기여했으면 해서”라고 밝혔다.

1941년 충북 증평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야나모도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을 썼다. 이는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여서 창씨개명은 전체주의적 사회통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한 사람들 중에는 애국심보다 가문에 대한 집착이 강한 측면이 있었으며 행동은 친일이면서 성씨를 고수한 사례도 없지 않았다”며 “당대 상황에 대한 기초적 식견 없이 막연히 오늘의 관점에서 당시 행적을 거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이어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던 일, 새로 부임한 일본 여선생님에게 느꼈던 애틋한 감정들을 마치 흑백사진처럼 보여준다. 광복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에 치렀던 ‘기이한 통성명’에 대한 기억도 흥미롭다. ‘아마기’ 교장 선생님이 자신을 ‘조 교장 선생’으로 불러 달라 하고 ‘니시하라’ 담임선생이 ‘이종환’이라고 밝히고 학생들은 각자 집에서 부르던 이름과 성을 말하는 것이 광복 이후 치른 첫 의식(儀式)이었다고 한다.

이어 그는 초등학교 동기생 3분의 1이 기계총을 앓고 도시락 도둑질이 끊이지 않던 시절, 영양부족으로 누구나 부스럼을 앓아 조고약과 이명래 고약이 방방곡곡에서 매상을 올리던 시절, 구역질나는 회충약을 한 국자씩 떠먹어야 했던 시절, 좌우로 나누어진 중학생들이 피 터지게 싸우고 교사도 무서워 말리지 못했던 시절이 먼 옛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의 기억과 추체험은 그래서 ‘옛날에 비해 잘 먹고 잘살면서도 고마운 줄 모르는 젊은 세대’에까지 향한다.

‘젊은 세대들은 40년 전 우리 국토가 김동인 단편소설이나 오장환 시에 나오는 ‘붉은 산’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한다. 나무가 우거진 청산이 마치 에베레스트처럼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한 인문학자의 ‘기억’과 ‘망각’에 대한 사색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과거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정신적 방위를 제안한다.

‘기억이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상습적 부정 거래자들의 회계장부 같은 것도, 범죄자 이력서처럼 말끔하게 정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얽히고설킨 미로와 같아서 제대로 파악하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

유 교수는 책 말미에 ‘잊어버린다는 것은 정의와 자유를 떨치기 위해 용서될 수 없는 걸 용서하는 것’이라는 마르쿠제의 말을 인용하면서 “내가 듣고 보고 했던 것이 전형적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저마다 특정 지역과 상황,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기록하고 교환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과거는 그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