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성원/청와대의 高총리 ‘압박’

  • 입력 2004년 5월 23일 18시 44분


“헌법정신을 시험에 들게 하려는 것인지, 총리의 소신을 시험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청와대측이 고건(高建) 국무총리가 장관 임명제청권을 행사해 줄 것을 거듭 요청하고 있는 데 대해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23일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이같이 말했다.

고 총리의 난색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측은 ‘결국 고 총리가 제청권을 행사해 줄 것’이라며 사실상 압박을 가하는 듯한 형국이다.

김우식(金雨植)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날 출입기자들과 만나 지난주 고 총리와 2차례 만난 사실을 소개하며 “모든 인사권은 대통령이 갖고 있으니 깊이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국무위원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총리의 제청권은 요식적인 권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학계의 해석도 엇갈리기 때문에 이를 권위주의적인 사고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도 어렵다.

새 총리가 임명돼 제청권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짧게 잡아도 6월 중순은 지나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분 개각을 통해 집권2기 국정운영의 틀을 잡으려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청와대가 겪고 있는 고충은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총리의 제청권이 ‘앞으로 내각을 통할하게 될’ 총리의 실질적인 대통령 보좌를 규정한 헌법장치임을 고려할 때 물러나는 총리에게 이를 종용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총리실의 한 관계자는 “총리가 청와대로부터 명단을 구술받아 형식적으로 제청권을 행사했던 과거와는 달리 서면으로 제청권을 행사함으로써 대통령의 시스템에 의한 인사권 행사 의지를 과시했던 노 대통령의 초심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욱이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존중해야 한다고 준엄하게 지적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문이 나온 지 열흘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원칙과 상식’에 입각해 제청권을 신임 총리에게 넘기려는 고 총리의 뜻을 굳이 꺾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헌재의 결정문을 다시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박성원 정치부기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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