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부형권/北대표단의 숨바꼭질

  • 입력 2004년 5월 14일 17시 42분


14일 0시40분경(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북한대사관 앞에선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의 ‘심야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북 대표단의 박명국 외무성 과장은 “미국이 주장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의 핵 폐기(CVID)’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실무그룹회의엔 계속 참석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몇몇 외신 기자들은 영어나 중국어 통역 없이 발표된 구두 성명을 해석하지 못해 쩔쩔맸고, 결국 한국 기자들이 이들에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달밤의 진풍경’이 벌어졌다. 북 대표단은 기자들의 질문도 일절 받지 않았다.

회견이 예고 없이 이뤄진 탓에 상당수 취재진은 성명 발표가 끝난 뒤에야 현장에 도착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북 대표단은 11일 오전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에 도착한 직후 100여명의 취재진을 피해 ‘숨바꼭질’을 했다.

한국과 일본 및 서방 주요 언론사 보도진은 북측 수석대표인 이근(李根) 외무성 미주국 부국장의 말을 한마디라도 듣기 위해 공항의 주요 출입구 3, 4곳에 진을 쳤다.

그러나 북 대표단은 도착 1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1층 국제선 도착 출구’ 대신 ‘2층 국내선 출발 입구’를 통해 공항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북 대표단의 이런 행태를 지켜보면서 북측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정확히 서방 언론에 전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면 그 방식도 ‘국제적 상식’과 규범에 맞아야 한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동안 북한은 각종 회담에서 ‘참석 자체’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거나, 막무가내식 주장으로 회담을 흔드는 이른바 ‘벼랑 끝 전술’을 자주 사용해 왔다.

자칫 ‘이상한 행태’만 부각되는 이런 비상식적인 모습이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마저 의심케 만든다는 점을 북측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상식을 존중하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가장 효과적인 외교방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북측이 하루빨리 깨달았으면 한다.

베이징에서

부형권 정치부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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