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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5월 12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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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9·11테러를 예방하지 못한 데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사과(sorry)라는 표현을 썼다. 6일 요르단 국왕과 회담한 뒤 백악관 정원에서 한 짧은 연설에서였다. 그는 연설 말미에 “나는 압둘라 국왕에게 포로들과 그 가족들이 느껴야 했던 수치심과 고통에 대해 사과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라크 국민이나 포로를 대표하는 당사자도 아닌 제3국의 국왕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는 간접화법 형식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대통령의 사과는 형식과 내용부터 미국과 다르다. 전직 대통령들이 측근과 아들의 비리 문제, 환란, 대북 송금, 공권력 남용 등과 관련해 사과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 가운데 침통한 표정으로 대(對)국민 담화문을 낭독하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국민적 분노의 해소와 정치적 마무리를 위해 사태가 위기 국면에 이른 시점을 택한 것도 공통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야당의 탄핵 의결은 그런 사과의 관례를 거부한 데 대한 반응이란 측면으로도 볼 수 있다.
▷대통령이 사과가 필요한 일을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상책임은 물론이다. 그래도 불가피하게 사과할 일이 생긴다면 시기와 형식 그리고 적절한 표현과 내용은 사과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사과의 진정성, 잘못에 따르는 책임의식, 재발 방지에 대한 의지일 것이다. 그런 알맹이가 빠진 형식적인 사과는 또 다른 사과를 불러올 뿐이다.
권순택 워싱턴특파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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