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한미 방위조약 50주년]북핵-反美 잇단 시험대

  • 입력 2003년 9월 30일 19시 09분


코멘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50주년을 하루 앞두고 30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나이트 필드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한미 양국의 군인들이 기수단을 앞세워 행진하고 있다. -김동주기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50주년을 하루 앞두고 30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나이트 필드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한미 양국의 군인들이 기수단을 앞세워 행진하고 있다. -김동주기자
《1일은 6·25전쟁 종전 직후인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지 꼭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양국은 조약 체결 이후 반세기 동안 ‘변함없는 혈맹’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올해 초부터 ‘미래 한미동맹’의 성격을 재조정하려는 작업이 공개적으로 이뤄질 만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한도 전통적 형제국인 중국 내부에서 ‘북-중 군사동맹 관계’ 수정론이 제기되는 등 한반도 전체의 정치군사적 지형이 재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국익에 입각한 친소(親疎)관계만 있을 뿐 영원한 우방이란 있을 수 없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에서 한국과 미국처럼 반세기가 넘게 공고한 동맹관계를 유지해 온 사례는 흔하지 않다.

한미동맹이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버팀목’ 때문이라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다.

▼관련기사▼

- 자동 군사개입 조항 명시안돼 모호
- 北위협 주도적방어가능땐 미군 일부만 잔류

최근 대북 인식의 변화와 반미 감정의 증폭 등으로 한미동맹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지만 동맹의 근간인 한미방위조약이 한국의 안보와 외교에 큰 기여를 해 온 점은 분명하다.

▽한미방위조약의 체결 배경=한미방위조약의 탄생은 역설적이게도 반세기 전 정전협정을 둘러싼 한미의 첨예한 대립이 발단이었다.

6·25전쟁 당시인 1953년 미국 주도의 유엔군은 공산군측과 정전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구소련과 중국의 세력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정전협정의 체결은 유엔군의 철수와 함께 북한군의 재남침을 초래한다며 크게 반발했다.

그럼에도 정전협정 체결이 대세가 되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과 호주, 뉴질랜드간에 체결된 조약과 같은 수준의 한미방위조약 체결과 경제 원조를 미국에 요구했으나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은 그해 6월 유엔과의 사전 협의 없이 유엔군 포로수용소에 있던 2만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실력 행사’에 나섰다.

이를 보고 한국을 무시한 정전협정의 체결은 힘들다고 판단한 미국은 국무부 특사와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을 잇달아 한국에 파견, 교섭을 통해 그해 8월 7일 한미방위조약을 가조인하고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식을 가졌다.

조약의 체결로 양국은 1882년 조미통상 협정 체결 후 71년 만에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지킨다는 공동이해에 기초한 동맹관계를 맺게 됐다. 이로 인해 미국은 ‘무기한’ 한국의 방위 의무를 지게 됐고, 한국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과 각종 군사 관련 후속협정을 통해 이를 지원해 왔다.

▽한미방위조약의 성과와 의미=한미방위조약은 강력한 군사동맹으로 반세기 동안 한국 안보의 큰 축을 담당해 왔다.

주한미군은 한미동맹의 부침과 미국의 국방정책에 따라 53년 당시 7만여명에서 2003년 현재 3만7000여명으로 감축됐으나 여전히 대북 억지력의 핵심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최전방에 배치된 미 2사단은 1만4000여명의 병력과 각종 첨단장비를 보유하고 유사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trip wire)’ 역할을 실질적으로 수행해 왔다. 한미연합작전계획상 북한이 재남침할 경우 미국은 69만여명의 증원군과 1000억달러 규모의 군사장비를 투입하도록 돼 있다.

최근 일각에선 자주국방론을 제기하고 있으나, 주한미군의 전력대체비가 연간 140억달러이고, 북한의 전략전술에 관한 정보의 90%를 미군의 감시장비에 의존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설익은’ 자주국방론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한미방위조약은 한국의 외교적 지위 상승에도 큰 기여를 했다. 세계 초강대국과의 혈맹관계를 ‘지렛대’로 한국은 러시아와 일본 등 주변국은 물론 국제무대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동등한 외교관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

연세대 국제대학원 이정민(李正民) 교수는 “미국의 확고한 방위공약을 뼈대로 한 한미방위조약이 없었다면 안보위기가 상존하는 한국이 지금과 같은 외교적 위상과 협상능력을 꿈꿀 수 없었을 것”이라며 “91년 거센 반미시위로 미군이 철수한 뒤 군사적 외교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필리핀의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北-中, 北-러 관계도 큰 변화▼

북한은 중국, 러시아와의 동맹을 한미동맹의 대항마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 같은 동맹은냉전 체제 붕괴 이후 관계 재설정의 과정을 거쳐왔다.

▽“이젠 혈맹 아니다”=북-중 관계는 전통적인 혈맹관계에서 ‘이중적인’ 동반자 관계로 바뀌고 있다. 중국에선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북한을 객관적으로 대우하자”는 기류가 형성됐다. 그러나 그 후 북한의 붕괴가능성이 제기되자 중국은 94∼96년 차관협정 및 대북 무상원조 협정을 맺었다.

61년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한 북-중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조약은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통일연구원 최춘흠(崔春欽) 선임연구위원은 “외교적 지도국가 위치를 노리는 중국이 향후 북한에 더 밀착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러시아의 남북한 등거리외교=러시아의 한반도 정책은 80년대 말 이후 몇 차례 바뀌었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 북한을 지원했던 친북한 정책은 러시아의 88년 서울올림픽 참가와 91년 한-러 수교를 거치면서 뚜렷한 친한 정책으로 바뀌었다. 61년 체결한 북-러 우호조약은 35년 만인 96년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파기됐다. 대체 조약은 아직 마련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러시아 정부는 2000년 국가 두마(의회)에서 “남북한에 균형관계를 유지한다(등거리외교)”는 원칙을 채택했다. 통일연구원 여인곤(余仁坤) 국제관계연구실장은 “러시아가 미국의 동북아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선 북한은 유용한 카드”라고 말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