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송금 '청와대 기획' 속속 드러나

  • 입력 2003년 5월 23일 18시 35분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뤄진 현대상선에 대한 4000억원 긴급대출은 청와대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3일 열린 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이근영(李瑾榮)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이기호(李起浩)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과 한광옥(韓光玉) 대통령비서실장이 대출과정에 직접 개입했음을 털어놓았다. 이는 대출금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해석된다.

이기호 전 수석과 이근영 전 위원장 등은 ‘국가경제를 생각해 내린 결정’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유동성 위기’ 때문에 이뤄진 대출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적지 않다.

먼저 이기호 전 수석이 당시 산업은행 총재였던 이근영 전 위원장을 만나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을 당부한 것은 남북정상회담을 불과 일주일여 남긴 2000년 6월 3일. 이후 통상 한달 이상 걸리는 대출이 일사천리로 진행돼 현대상선은 6월 5일 대출을 신청, 이틀 만인 7일 4000억원이라는 거액을 산은으로부터 받아내 6월 9일 그중 2235억원을 국정원의 도움을 받아 정상회담 직전 북한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

또 이기호 전 수석이 ‘유동성 위기’를 상의하기 위해 이근영 전 위원장을 만난 곳은 청와대 등 공식적인 회의 장소가 아닌 서울시내 모 호텔 식당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해명과는 달리 보안을 의식해서 비공식적으로 비밀리에 만난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정치인 출신으로 평소 경제 문제에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한 전 비서실장이 이 전 위원장이 이 전 경제수석을 만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를 걸어 현대에 대출을 해주라고 당부한 것은 청와대가 뭔가 급박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유동성 위기’를 막기 위한 대출이 현대의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이 아닌 국책은행인 산은에서 이뤄진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 결국 당시 대출은 현대가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한 대북 송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와대와 긴밀하게 협의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전 수석 등이 거론한 ‘유동성 위기’는 명목상의 이유에 불과하다는 정황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특검팀은 그동안의 실무진 조사에서 확보한 자료와 진술 등을 근거로 조만간 이 전 수석과 한 전 실장을 소환, 본격적인 수사에 나설 것으로 보여 금융계 인사들이 상식 밖이라고 말하는 대북 송금의 실체가 곧 베일을 벗게 될 전망이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김재영기자 ja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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