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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4월 18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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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정계 복귀 및 집권 산실(産室)이었던 아태재단의 영욕(榮辱)의 역사는 DJ의 역정과 맥을 같이한다. DJ는 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해 94년 1월 이 재단을 설립했다. 취지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 아시아의 민주화, 세계평화에 관한 이론과 정책 연구개발이었다.
이 재단을 모체로 DJ는 국민회의를 창당했고 97년 대선 때 아태재단은 정권 창출의 후방 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설립 직후부터 아태재단은 끊임없이 구설수에 휘말렸다. 학술단체로 출발했으나 ‘DJ의 정치 사조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집권 이후에는 권력으로 통하는 통로라는 소문이 나면서 정치브로커들의 집합소 역할을 했다. 실제로 재단은 현 정권 출범 후 정부 요직이나 각종 산하단체 등에 인재를 배출하는 산실이 됐다.
아태재단 출신들은 DJ 정부 요직에 포진해 ‘권력의 단맛’을 만끽했다. 재단 사무총장을 지낸 임동원(林東源) 대통령외교안보특보를 비롯해 현 정부에서 등용된 아태 출신은 수십명에 이른다.
후원금을 둘러싼 추문과 각종 비리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재단이 94년 이후 2000년까지 7년 동안 걷은 후원금은 모두 213억원. 지난해에도 20억원의 후원금 수입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재단 측은 “야당 시절부터 도와준 자발적인 소액 다수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 재단을 운영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야당은 “상당 부분은 사실상의 정치헌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민주당의 한 인사도 “공천을 앞두고는 대부분 아태재단의 후원회 쿠폰을 사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각종 비리 의혹에 연루돼 구속된 아태재단의 전현직 간부만도 4명이나 된다. 재단 후원회 중앙위원을 지낸 김영래씨는 99년 5월 장흥군수 공천 사기로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고, 같은 해 7월에는 이영우(李映雨) 전 재단 미주지부 이사가 경기은행 퇴출을 막아달라며 경기은행 측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황용배(黃龍培) 전 후원회 사무처장이 ‘진승현 게이트’와 관련해 금감원 조사를 무마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그러나 이는 ‘시작의 시작’에 불과했다.
DJ의 최측근인 ‘동교동 집사’ 이수동(李守東)씨가 ‘이용호 게이트’와 관련해 금감원 조사를 무마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이씨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특검팀에 구속되는 등 비리연루의혹 사건이 잇따랐다.
특히 이씨 수사 과정에서 김 대통령의 차남 홍업(弘業)씨의 고교 동창인 김성환(金盛煥) 씨의 자금 일부가 재단으로 유입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재단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다. 홍업씨의 지인 및 이수동 전 이사 등 재단 관계자 3명은 ‘정현준 게이트’와 관련해 그 회사 주식 10억원어치를 샀다가 주가가 폭락하자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은 사건에도 연루돼 세간의 빈축을 샀다.
재단은 김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 바로 옆 384평 부지에 부지 매입비 및 건축비 등 총 90억원을 들여 새 건물을 지었다. 김 대통령 집무실도 마련해 놓았다. 김 대통령은 재단 유지에 집착을 보이고 있으나 무리한 건물 신축과 후원회 수입 감소 등으로 인해 최근 들어선 한 달 경상비 8000여만원을 마련하기에도 허덕일 정도로 수입이 급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아태평화재단 연혁
△94년1월5일: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외무부 등록, 초대 김대중 이사장 취임
△94년1월27일: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설립
△94년7월20일:재단후원회 발족
△95년2월10일:아태평화재단으로 법인명 변경
△97년12월19일:김대중 이사장 대통령 당선
△98년2월23일:2대 이문영 이사장 취임
△99년12월14일:3대 오기평 이사장 취임
△2001년12월25일:동교동 신축 건물로 이사
△2002년2월28일:이수동 상임이사 구속
△2002년4월18일:활동 잠정중단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