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이산가족 상봉史]90년대 비공식 재회 활발

  • 입력 2000년 7월 18일 18시 50분


64년 도쿄(東京)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10월9일. 당시 북한 육상선수로 출전한 신금단씨(당시 26세)와 서울에서 달려간 아버지 신문준씨(당시 49세·83년 사망)가 헤어진 지 23년 만에 극적으로 만났다.

도쿄 조선회관에서 이뤄진 7분간의 짧은 만남.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단 네마디의 안부 대화만 나눈 뒤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남북간 이산가족 상봉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장면이다. 이렇게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사는 때론 숨가쁘게, 때론 지지부진하게 엮어지면서 올해 8·15 이산가족 교환방문에까지 이르렀다.

45년 남북분단 이후 추진돼 온 이산가족 교류는 크게 두 갈래. 한 갈래는 남북 정부간 또는 적십자사간의 접촉을 통한 공식 교류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의 승인 하에 이뤄진 제3국에서의 상봉 등 민간 차원의 비공식 교류다.

▽공식 교류〓분단 40년만인 85년 처음 이뤄졌으며 올해 8·15 교환방문을 논외로 치면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는 84년 여름 북한이 수재물자 제공을 제의, 정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조성된 일시적 해빙 분위기 속에서의 일이었다.

당시 남북한에서 각각 50명의 고향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방문, 모두 75명의 이산가족이 92명의 가족 및 친척과 감격적인 해후를 했다.

남북한 당국이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공식 접촉을 시작한 것은 71년 8월. 대한적십자사 최두선(崔斗善)총재가 ‘1000만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북측이 이를 수락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72년 8월 남북적십자사간 직통전화가 개통되고 회담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리면서 급류를 탔다. 하지만 73년 8월 정치적인 이유로 북측이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한다’고 발표, 제동이 걸리면서 그 뒤로는 회담이 지지부진했다.

그 이후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남북한의 기본 입장은 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92년의 부속합의서에 잘 반영돼 있다. 주요 내용은 △생사 확인 △주소 확인 △자유 왕래와 방문 △서신거래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 등 5개항.

이에 근거해 양측은 수많은 접촉을 벌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다 98년 현정부 출범 이후 다시 급진전됐다. 지난달 열린 남북 정상회담은 두 번째 이산가족 교환방문의 공식 물꼬를 트는 계기였다.

▽비공식 교류〓공식 교류와 달리 비공식 교류는 다양한 채널로 이뤄져 왔다. 90년 3월 한필성(韓弼聖) 필화(弼花) 남매가 일본의 삿포로 동계 아시아경기를 계기로 만났고, 그 해 10월엔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한 이회택감독이 아버지 이용진씨와 상봉했다.

또 90년 10월 남북 고위급회담 남측 대표로 평양을 방문한 강영훈총리와 홍성철통일원장관이 누이동생 등 가족을 만나기도 했다.

비공식 만남은 90년 남북교류협력법이 만들어져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민간단체 등의 주선으로 중국을 통한 상봉이 주류를 이뤘다. 통일부에 따르면 90년 이후 지금까지 중국 등 제3국에서의 상봉은 모두 540건, 방북 상봉은 10건.

정부는 올 3월 ‘이산가족 교류촉진 지원계획’을 마련, 이산가족 교류절차를 간소화하고 일정액의 교류경비를 지원하는 등 민간 차원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진녕기자>jinnyong@donga.com

1990년이후 남북 이산가족 교류 현황(단위:건, 자료 통일부)
연도909192939495969798992000
(1∼6월)
생사확인35127132221135104961643774812762,148
서신교환441934629485845714737724696376215,774
제3국 상봉61119121117186110819582540
방북 상봉--------15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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