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부, KDI 연구결과 발표못하게 압력…'홀로서기' 무산

  • 입력 2000년 7월 4일 19시 14분


경제정책 분야의 대표적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연구결과에 대한 정부의 간섭에 반발해 ‘홀로서기’를 시도했다가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국민연금의 허점을 지적한 논문 발표를 연기해 물의를 빚은 데 이어 KDI까지 정부 간섭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국책연구기관의 정체성 확보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KDI는 4일 관할부처인 재정경제부가 연구결과 발표에 대해 제동을 거는 경우가 많아 사안에 따라서는 재경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발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KDI 관계자는 “재경부가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내용의 발표를 막거나 발표 시기를 미루도록 강요하고 심지어 실업률 등 민감한 경제전망치에 대해서는 수정을 요구하는 사례까지 있다”고 주장했다.

벤처기업 주가에 거품이 있다는 연구보고서 발표가 코스닥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논리에 밀려 연기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 특히 남북 정상회담을 전후해 남북경협이 관심사로 부각되자 정부측이 공문을 보내 신문 인터뷰나 방송출연을 자제할 것을 요구, 연구원들의 불만이 더욱 커졌다.

KDI의 독자행동 모색 움직임이 알려진 4일 재경부는 KDI측에 거세게 항의했다. 재경부는 “벤처기업 보고서는 정부가 용역을 발주한 것인 만큼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반박했다.

KDI는 결국 이날 오전 이진순(李鎭淳)원장 주재로 회의를 갖고 “발표방식의 변경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결정한 바 없다”면서 “앞으로도 연구결과는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 발표할 것”이라고 물러섰다. KDI 고위관계자는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확인한 회의”라면서도 “정부의 압력부분은 언급할 입장이 아니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KDI의 한 연구위원은 “재경부의 처사도 문제지만 연구원들의 정서를 무시한 채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수뇌부의 태도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라며 씁쓸해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