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박지원장관이 전하는 스토리 재구성

  • 입력 2000년 4월 11일 19시 50분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대북 밀사’로 급부상한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 장관은 11일 청사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 송호경(宋浩景)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의 긴박했던 베이징 회담 과정의 뒷 얘기들을 공개했다.

▼1차회담▼

북한측이 판문점을 통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남북한 특사회담을 열자고 제의해 온 것은 지난달 13일 경.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15일 박장관을 관저로 불러 대통령 특사로 상하이로 떠나도록 지시했다. 박장관은 17일 건강체크를 이유로 휴가를 내고 오전 9시 20분 아시아나 비행기로 상하이로 출발했다. 상하이에서 4차례에 걸쳐 북측 송부위원장과 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얘기가 조금도 진척되지 않아 박장관은 19일 귀국했다.

▼2차회담▼

다시 북측에서 ‘3월 22일 베이징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와 박장관은 22일 중국민항 편으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오후 5시 회담을 가지려 했지만 양측의 이견이 전혀 좁혀지지 않아 회동을 하지 않고 전화로만 연락하다 다음날 오전 5시에 만났다.

양측의 가장 큰 이견은 북측이 정상회담 개최 합의문에 ‘김정일’이라는 이름을 명기하지 않으려 한데서 비롯됐다. 박장관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이름을 넣지 않으면 합의를 할 수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김정일’을 명시하지 않고 북측이 얘기하는 대로 ‘최고위급 회담’이라고 못을 박을 경우 자칫 북한이 마지막 순간에 헌법상 최고위급인 김영남(金永南)을 내보낼 수도 있다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송부위원장은 또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이름을 명기할 경우 ‘김정일’ 활자만은 다른 글자에 비해 1.5배 키워야 한다고 요구해 한국측 대표단을 아연케 했다. 합의문 중 ‘김대중대통령의 요청에 의해’라는 대목에서도 양측의 의견이 엇갈렸다. 북측은 “김대통령이 여러차례 정상회담을 요청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했고, 박장관은 “우리가 요청은 했지만 당신들이 초청을 해야 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맞서 회담은 또다시 결렬됐다.

▼3차회담▼

북측이 4월 7일 다시 연락을 해 와 박장관과 송부위원장은 8일 베이징 차이나 월드호텔에서 만났다. 양측은 오후 4시부터 회담을 시작해 7시 25분 최종 합의를 봤다. 결국 ‘김정일’을 합의문에 명기하는 것으로 북한이 양보했고, ‘요청’과 ‘초청’문제는 상호편의주의 원칙에 따라 북측에서는 ‘김대중대통령의 요청’으로, 남측에서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고, 양측이 각각 작성한 합의문을 교환했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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