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0돌 기획]「2·8선언」「 3·1선언」 비교

  • 입력 1999년 2월 7일 20시 01분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쓴 ‘2·8독립선언서’와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쓴 ‘3·1독립선언서’는 당대(當代)의 명문장가(名文章家)가 쓴 당대의 명문으로 통한다. 두 사람 모두 그 이후의 친일행적으로 우리 역사에 뼈아픈 상처를 남겼지만 그 식견은 탁월했고 문장은 유려하다.

일제하 우리 민족의 궐기를 알렸던 두 선언문을 비교하면 두 사람의 성품과는 반대로 이광수의 ‘2·8독립선언서’는 강경하고 투쟁적인 반면 최남선의 ‘3·1독립선언서’는 온건하며 인도주의적이라고 평한다.

‘오족(吾族)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한 열혈(熱血)을 유(流)할지니… 오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宣)하리라… 차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기책(其責)에 임(任)치 아니함.’(2·8독립선언서)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吾人)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데까지던지 광명정대하게 하라.’(3·1독립선언서)

‘2·8선언서’는 폭력을 불사하고 끝까지 피흘려 투쟁하겠다는 내용이고 ‘3·1선언서’는 질서와 법을 지키면서 독립의지를 천명하겠다는 내용이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첫째, 주도자들의 신분과 연령 차이. 2·8선언 참가자들(평균연령 26세)은 젊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이 과감하고 자유로웠던 반면 3·1선언 참가자(평균연령 48세)들은 학생들보다는 주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추론이다.

둘째, 주도자들의 의식 차이. 2·8선언 주도자들은 유학생으로 서구의 시민혁명, 투쟁적인 자유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은 반면 3·1선언의 33인은 인류공생을 추구하는 인도적 민주주의의 원칙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셋째, 규합 대상의 차이. 2·8선언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선언서가 강경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3·1선언은 계층과 나이를 초월해 전국민의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아무리 독립이라는 대의를 천명하더라도 지나치게 과격한 표현을 삼갔던 것이다.

넷째, 당시 한국과 일본의 보안 및 검열 등의 차이. 당시 일본은 어느 정도 언로가 틔어 있었지만 식민지 한국 땅에선 언론자유가 일절 금지돼 있어 이러한 차이를 가져왔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이정은(李廷銀)연구원은 “단지 표현의 강약으로 투쟁성을 판단해선 안된다”고 말하고 “3·1선언서의 도덕적 인도주의 원칙은 결코 폄훼될 수 없는 숭고한 정신”이라고 평가했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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