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1%」가 제15대 대선의 승패를 갈랐다. 그러면 어디에 김대중(金大中)국민회의후보와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후보의 운명을 한순간에 가른 1%가 숨어 있었을까.
승패의 인과(因果)는 길고 복잡하다. 그러나 3당 관계자들이나 여론조사전문가들은 우선 대선전 끝까지 두 후보의 피를 말리는 「반집 패싸움」의 전단(戰端)으로 경제파탄 책임공방과 국제통화기금(IMF)재협상 논란을 든다.
처음 IMF쇼크에 따른 경제파탄 책임공방은 김후보에게 다소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보가 바로 촉발시킨 IMF재협상 논란은 다시 국면을 반전시키며 마지막까지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으로 몰고갔다.
결국 이번 대선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한 것은 이인제(李仁濟)국민신당후보의 득표율과 영남표의 결집 및 분산 정도였다는 게 양측의 공통된 분석이다.
한나라당은 대구 경북(TK)에서는 강한 「반(反) YS」 정서에 힘입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부산 울산 경남(PK)에서는 기대치를 밑돈 것으로 자평한다. 이는 물론 PK지역에서 이인제후보의 상대적 선전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PK지역에서 80%이상 투표에 60%이상 득표하고 이인제후보의 총득표율을 15%선으로 묶어둬야 낙승할 것으로 전망했으나 두 가지 조건은 모두 충족되지 않았다.
PK지역 투표율은 기대치에 접근했으나 득표율은 50%안팎에 그쳤고 이인제후보의 총득표율은 한나라당이 가장 우려하던 수준인 20%선에 육박했다.
김후보 승리의 원인(遠因)을 찾는다면 김후보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 박태준(朴泰俊)총재와의 이른바 「DJT연합」에 따라 전반적으로 「반 DJ」 정서가 희석된 것을 꼽을 수 있다.
또한 IMF쇼크는 선거 때만 되면 김후보에게 몸살을 앓게 했던 「북풍(北風)」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색깔시비의 위력을 현저히 약화시켜 김후보의 순항(順航)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7월21일 신한국당의 경선 직후 지지율이 50%선까지 치솟았던 이회창후보는 경선후유증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치력 부재 및 다소 경직된 자세로 인해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면서 「반 이회창」 세력을 양산한 게 패인(敗因)중 하나로 지적된다.
더욱이 당내 불협화음이 심각한 상황에서 불거진 이후보 두 아들의 병역면제의혹은 이후보에게 깊은 내상(內傷)을 입혔다. 대선 직전 미국에 유학중인 차남을 급거 귀국시켜 「키재기」를 해야 했을 정도로 아들들의 병역면제의혹은 이후보를 끝까지 괴롭혔다.
〈임채청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