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인물탐구/그가 걸어온 길]권력-영욕 모두 맛봐

  • 입력 1997년 7월 24일 20시 00분


1926년 1월7일 백제 흥망의 역사가 서린 백마강 기슭의 한 마을(부여군 규암면 외산리)에서 풍운아 JP는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유복했다. 자수성가한 조부는 쌀 2천섬지기 부농이었다. 그는 7형제 중 다섯째. 선친 金相培(김상배)씨는 15년 동안 규암면장 부여면장 등 공직자로 일했다. 조숙했던 그는 초등학교 때 이미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을 읽었고 수석과 급장을 놓치지 않고 학교를 마쳤다. 공주중학에 진학해서도 그의 호주머니에는 늘 이와나미(岩波) 문고판 책들이 들어 있었다. 공주중을 졸업하고 그는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하고 보령군 천북면의 초등학교에 발령받아 훈도로 재직하다 46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그는 고학을 했다. 그러나 생활이 점점 힘들어지면서 졸업 1년을 앞두고 대학을 포기했다. 그러던 어느날 파고다공원에서 국방경비대 대원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사병으로 자원입대했다. 그러나 고된 훈련과 옥수수밥, 몽둥이 세례에 질려버린 그는 1주일만에 탈영했다. 탈영병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육사교도대에 들어가 말단 행정요원으로 복무하다 49년 육사 제8기로 정식 입교했다. 5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장교로 임관해 배속된 곳이 육군본부 정보국. 여기서 그는 당시 숙군(肅軍)사건에 연루돼 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살아나 전투정보과 문관으로 근무하던 朴正熙(박정희)와 운명적 조우를 한다.두사람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6.25를 겪으면서 둘 사이의 정은 깊어갔다. 특히 전쟁 와중에 JP는 대구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정희중령의 조카딸 朴榮玉(박영옥)씨와 결혼하면서 「조카사위와 처삼촌」의 관계로 발전했다. 4.19직후 소장파장교들과 정군운동을 주도한 JP는 하극상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강제예편을 당했고 결국 「5.16 거사(擧事)」의 길로 나선다. 박정희가 5.16의 지휘자였다면 JP는 기획자였다. 혁명공약과 혁명후의 군사정부체계와 사업, 민정이양 스케줄, 그리고 정치개혁 사회개혁 군부개혁 등의 계획서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는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현대 정당조직 모델을 도입한 공화당의 사전조직은 5.16주체세력 내부의 갈등을 일으킨다. 공화당 사전조직에 소외감을 느껴온 장군파는 영관급 세력의 정점에 있던 JP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결국 그는 훌쩍 기약없는 외유길에 올랐다. 이른바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 외유. 무려 8개월 동안 공산권을 제외한 전 유럽을 돌아다녔다. 귀국후 그는 평당원으로 공화당에 복당, 정치를 재개했다. 그는 고향인 부여에서 출마,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공화당 당의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1년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장기외유를 떠나야했다. 대일청구권 협상과 관련, 「김―오히라 메모」 소식이 전해지자 여론이 들끓고 급기야 6.3사태로 번지면서 張坰淳(장경순)국회부의장 등 이른바 「반김(反金)라인」이 그를 내몰았던 것이다. 6.3사태가 잠잠해지면서 6개월만의 외유에서 돌아온 그는 부여에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의 안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얄궂은 운명의 여신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그는 68년 3선개헌 문제에 봉착했다. 공화당내에서 3선개헌을 반대하는 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졌다. JP계열 인사들이 중심이 된 국민복지회에서 3선개헌에 반대하고 JP대안론을 들고 나온 괴문서가 발견된 것이다.결국 모든 공직에서 사퇴해야 했다.의원직도 당연히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3선개헌 반대 입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임자가 아니면 누가 날 도울 거야…』라는 박대통령의 설득에 JP는 『모시고 혁명을 한 죄로…』라며 소신을 굽혔다. 그는 「자의반 타의반」 설득작업에 나섰다. 그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정치생명이 끝난 것으로 알았다. 71년6월. 정계를 은퇴한 지 3년만에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무총리에 기용됐다. 4년6개월간 재임했다. 그러나 金炯旭(김형욱) 李厚洛(이후락)으로 이어지는 중앙정보부장의 전횡으로 그는 주요 국정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79년 10.26이 터지면서 그는 공화당 총재직을 떠맡았다. 그는 「체육관 대통령」은 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金泳三(김영삼) 金大中(김대중)씨와 함께 대선출마를 준비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너무 짧았다. 12.12 이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은 왔지만 봄이 아니다)」이라는 말을 자주 인용했던 그의 예측은 공교롭게도 적중했다. 이듬해 5.17이 나면서 그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46일간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다. 미국에 체류하던 85년3월 그는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정치규제법에서 풀려난 것을 알았다. 그가 귀국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86년2월. 87년10월 정치재개를 선언, 신민주공화당 대통령후보로 13대 대선에 출마했다. 결과는 4등 낙선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총선에서 35석을 차지,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고 2년여 뒤 3당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민자당 대표로서 김영삼씨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집권 민주계가 자신을 대표직에서 내몰려하자 95년 민자당을 탈당했다. 동반탈당자 5명과 함께 자민련을 창당한 그는 6.27 지방선거에서 대약진했고 4.11총선에서 도약했다. 이제 그는 오는 12월 15대 대선에 재도전한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마일이 남아 있다』면서. 〈이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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