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싱가포르에서 있은 柳宗夏(유종하)외무부장관과 錢其琛(전기침)중국외교부장의 회담은 유장관의 표현대로 「유용한 대화의 시작」에 불과했다. 특히 전외교부장은 『우리는 黃長燁(황장엽)비서의 망명사건에 대해 「철저한 암흑상태」(사실관계를 전혀 모른다)이기 때문에 상황파악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며 중국정부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 언질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정부가 이미 한국정부로부터 황의 망명에 관해 상세한 통보를 받았으면서도 「상황파악」을 내세워 늑장을 부리는 것은 황의 망명 저지를 위한 북한의 필사적 저항 때문이다.
전부장은 회담에서 『북한으로부터 (한국정부의 요청과는) 다른 요청을 받았다』며 남북한이 황의 망명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는 결정을 내리기 곤란하다는 뜻을 시사했다. 북한의 「다른 요청」이란 황을 남한에서 납치했으니 북한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측은 「상황파악」에도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회담에서 중국측은 황을 직접 면담하겠다는 요청도 하지 않았다고 유장관은 전했다.
이에 따라 한국측도 이날 회담에서 황의 자유의사를 존중하고 인도적 견지에서 서울에 올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는 기본입장을 전달했을 뿐 망명처리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망명신청자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국제관례에 따라 해결해 달라는 유장관의 요청에 대해서도 전부장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부장은 회담이 끝난 뒤 짤막한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정부가 아무런 구체적 제의를 하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이에 따라 황의 망명처리를 위한 韓中(한중)교섭은 장기화가 불가피해졌다. 무엇보다 중국측이 「상황파악」을 핑계삼아 당분간 모호한 태도를 견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남북한 양측이 냉정하고 조용한(Cool and Calm) 방법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유념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중국측의 주장은 현재 상황을 당분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분석된다.
유장관은 황의 망명문제에 대해 양국이 계속 접촉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을 이날 회담의 성과로 꼽았다.
그러나 외교채널을 통한 접촉이 계속된다 해도 중국측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협상은 진전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국측은 당초 30분간으로 예정됐던 이날 회담을 다음번 회담상대자인 그리스 외무장관을 기다리게 하면서 17분이나 연장, 황의 망명사건을 중대한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졌다.
〈싱가포르〓방형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