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만 기자] 북한노동당 黃長燁(황장엽)비서는 지난 1월2일자로 A4용지 13장 분량의 서신을 작성, 한국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그는 12일 북경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에서 A4용지 3장 분량의 자술서를 썼다. 서신과 자술서는 같은 필적이지만 내용에서는 여러가지로 다르다.
서신에서 그는 『인민 노동자 농민 지식인이 굶어죽는 북한은 사회주의도 아니다』 『봉건사회가 이 정도되면 농민폭동이라도 일어나겠지만 독재와 탄압이 무자비한 북에서는…』이라는 등 북한체제를 극단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특히 『북한을 빨리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남한이 안기부와 군대를 강화하고 강한 여당을 만들어야 하며 북의 약점을 조장해야 한다』고 「북한붕괴촉진 처방」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자술서에서 그는 『노동당과 영도자의 두터운 사랑과 배려를 받아왔다. 따라서 감사의 정(情)이 있을 뿐이다』 『공화국이 경제적으로 좀 곤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잘 단결돼 있어 붕괴될 위험성은 없다』고 적었다. 「북한붕괴 필수론」에 입각해 붕괴촉진방안까지 충고했던 그가 41일만에 너무 다른 얘기를 한 것이다.
자술서에서 그는 분단 반세기가 지나도록 남한을 적화통일할 야욕을 견지하고 있는 북(北)이나 민족의 적지 않은 부분(북한)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관심이 없는 남(南)측 모두가 『제 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며 남북쌍방을 공격했다. 서신에 비해 훨씬 균형을 잡은 셈이다.
자술서에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넘어가는 나를 가족부터 미쳤다고 평가할 것이다. 나 자신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할 때가 적지 않다』고 썼다.
이는 지식인의 변절로는 잔인하다고 할만큼 북한의 참상과 폭정을 폭로하고 남한의 한총련 사태와 노동법관련 파업을 민족반역행위라고 준열히 비난한 서신과 크게 다르다.
서신에서는 신념에 찬 선전선동가의 면모가 드러났지만 자술서에서는 인생의 황혼을 맞은 노철학자의 허무감과 감상적 분위기가 짙게 풍긴다. 자신은 정치에 실패한 사람이고 남북 어느 쪽에서도 한몫 하려는 생각은 없으며 민족의 불행(분단)을 구하는 문제를 협의해 보려고 망명을 선택했다고 자술서에서 밝혔다.
서신은 거칠고 과격한 표현과 북한최고 지식인답지 않은 이분법적 사고를 내보였지만 자술서는 그의 양식과 심경을 비교적 진솔하게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