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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람속으로

韓독립-교육 헌신 ‘우리암’ 선교사의 뜻 기억할게요

입력 2022-08-15 03:00업데이트 2022-08-1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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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27명 광복절 맞아 방한
일제시대 영명학교 설립-교장 재직
유우석-조병옥 등 애국지사 배출
본보도 활동 소개… 신사참배 거부
1906년 충남 공주에 영명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에 헌신한 고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 한국 이름이 우리암이다(위쪽 사진). 그의 증손자 조지 윌리엄스 목사가 14일 광복 77주년을 맞아 공주영명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특별 감사 연합예배에서 방한한 27명의 후손 대표로 인사하고 있다. 한국선교유적연구회 제공·공주=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앞으로도 한미 양국이 우정을 쌓아가길 바랍니다.”(우리암 선교사 증손녀 엘리자베스 윌리엄스 그레고리 목사)

일제강점기 한때 유관순 열사(1902∼1920)도 다녔던 영명학교를 세워 한민족의 독립과 교육에 헌신한 프랭크 윌리엄스(한국 이름 우리암·1883∼1962) 미국 선교사의 후손 27명이 광복절 77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았다. 우리암·우광복선교사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처음 방한한 이들은 14일 우 선교사가 세운 충남 공주영명중고교 강당에서 열린 ‘8·15 광복 77주년 특별 감사 연합예배’에 참석했다.

공주시기독교연합회가 주최한 예배에서 증손자인 조지 윌리엄스 목사(56)는 “우리 가족의 사명은 언제나 ‘자유’였다”며 감사함을 표했다. 이 자리엔 표용은 공주영명중고교 이사장과 노시청 우리암·우광복선교기념사업회장,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장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예배에 앞서 강당 입구에 있는 우 선교사 흉상 앞에선 가족이 새로 제작한 동판 제막식도 열렸다. 1937년 제자들이 만든 기존 흉상은 일제가 녹여 무기를 만드는 데 썼고, 광복 뒤 다시 만들어졌다. 증손녀인 그레고리 목사(57)는 “최근에 기존 흉상 받침대는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을 기려 돌 33개를 다듬어 넣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뜻을 되살리려 가족들이 비용을 모아 현재 흉상 받침대도 바꿀 예정”이라고 전했다.

1906년 9월 한국에 온 우 선교사는 같은 해 10월 ‘전도·애국·개화·자립’ 이념을 바탕으로 영명학교를 세운 뒤 34년간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몸 바치는 애국자를 기른다’는 교훈 아래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영명학교가 배출한 졸업생 1만7000여 명 가운데는 유 열사의 오빠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유우석(1899∼1968), 대한민국 내무장관을 지냈던 조병옥(1894∼1960) 등 애국지사도 포함돼 있다.

그의 헌신은 당시 동아일보에도 소개됐다. 1938년 5월 22일자 ‘사학계의 공로자 영명학교장 우리암 씨’ 제목의 기사에서 그의 공적에 대해 “부단한 노력과 심신을 경주하야 … 영명문하에서 형설(螢雪)의 공을 성취한 다수 영재는 남북에 산재하야 사농공상 각계에 활약하고 있으며…”라고 썼다.

우 선교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다 1940년 한국에서 추방됐다. 학교도 1942년 강제 폐교됐다. 영명학교는 광복 뒤 1949년 다시 문을 열었다. 한국의 농촌 근대화에도 힘썼던 우 선교사는 광복 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서 미군정 농업고문으로 5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우 선교사는 1907년 첫아들의 이름을 ‘우광복’(1907∼1994)으로 짓기도 했다. 한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염원이었다.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우광복은 존 하지 군정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통역 등을 맡았다.

우 선교사의 후손들은 15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주최 감사 행사에 참석한다. 벡스코에선 15일부터 이틀간 ‘우리암·우광복 선교사 사진전’도 열린다.

공주=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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