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여대에서 1989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레이디스 잉글리시’ 수강생들이 지난달 27일 숙명여대 사회교육관에서 영어 수업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최정임 국제언어교육원 교수, 오주현, 백춘강, 이덕미, 박봉업, 박성순, 김계월 씨. 숙명여대 제공
“발음을 예쁘게 해야 돼요. 따라해 보세요. 앤드 아이 미스 유(and I miss you).”
지난달 27일 서울 숙명여대 사회교육관. 최정임 국제언어교육원 교수(78·여)가 영어 발음 시범을 보였다. 강의실에 앉은 학생 6명은 눈을 반짝이며 또박또박 따라 읽었다. 교수와 학생을 합해 평균 연령 72.7세. 1989년 3월 시작된 ‘레이디스 잉글리시(어머니 영어교실)’ 학생들이다. 이들은 25년이 넘도록 매학기 일주일에 두 번씩(월·목요일 오후 1∼3시) 모여 공부를 하고 있다.
수업 시간은 총 2시간. 영어 회화나 노래를 배우고, 시사 이슈와 관련된 영문을 해독하기도 한다. 이날 할머니들은 미국 가수 ‘냇 킹 콜’의 ‘낙엽(Autumn Leaves)’이라는 노래를 배웠다. 무궁화에 관해 영어로 쓴 글을 해석하기도 했다.
수강료는 한 학기에 30만 원. ‘진도 달성’이나 ‘시험’ 같은 목표는 없다. 그저 영어를 공부하는 것 자체가 목표다. 수강생 이덕미 씨(77·여)는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쓸 기회가 많진 않지만, 몇 마디 알아듣고 읽을 수 있으니 좋더라”고 말했다. 김계월 씨(69·여)는 “외국 영화를 볼 때 대화를 알아듣고 싶어서 배웠는데 간단한 문장은 알아듣게 됐다”고 말했다.
강의가 생긴 뒤 25년간 이곳을 거쳐 간 학생은 수백 명. 나이가 들면서 개인 사정으로 못 나오거나, 별세한 학생도 있었다. 꾸준히 나오는 학생은 현재 총 9명으로 줄었다. 수강생이 10명 미만이라는 이유로 지난해에는 폐강 위기에 처했다. 이때 최고령 박봉업 씨(83·여)는 두 학기에 걸쳐 2명분 수업료를 냈다. 수업을 꼭 이어나가고 싶어서였다. 박 씨는 수강생들 사이에서도 ‘학구파’로 불린다. 25년간 단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수업을 듣고, 집에 가면 매일 복습을 한다. 박 씨는 “영어 공부를 시작해보니 이게 내게 딱 맞는 취미였다. 학교에 나오는 게 정말 좋다”고 말했다.
수강생 오주현 씨(66·여)는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영어를 배우지 못했다. 매일 신문 3개를 정독할 정도로 지식에 목말랐지만, 영어를 못하는 게 한으로 남아 수업에 등록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집안 곳곳에 영어 단어장을 붙여놓고 공부한 끝에 실력이 늘었다. 오 씨는 “영어 공부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며 웃었다. 반장 백춘강 씨(69·여)는 “이곳은 많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누구나 적응할 수 있는 곳”이라며 뿌듯해했다.
수강생들이 배우는 이슈는 복지 및 인구 정책, 이순신 열풍 등 사회 전반을 넘나든다.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영어 연설문을 공부한 적도 있다. 박성순 씨(67·여)는 “영어만 배우는 게 아니라 형님(할머니)들이 품위가 있어서 만나면 즐겁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우리 학생들이 무척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저보고 ‘교수님, 우리 죽을 때까지 수업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수업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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