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좋아 한국의 흙이 된 일본인 父子

  • 입력 2006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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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보고 싶었다….’

경기 양주시 삼성공원묘지에 가면 일본인 이름이 새겨진 두 개의 묘비가 눈에 띈다. 아버지 나카무라 도시오(中村利雄·2004년 작고)와 아들 후미야(章也·1972년 작고)의 묘지다. 일본인 부자가 대한해협을 건너 이국땅에 묻힌 사연은 어떤 것일까?

○아들의 한국사랑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한국은 남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기억할 수 없는 어린 시절 옛 고향에 다시 돌아온 것 같아요.”(1968년 후미야의 편지 중)

시간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미야는 한국 문화를 사랑했던 특이한 일본 청년이었다. 나라(奈良) 시 덴리(天理)대 한국어과 출신인 그는 ‘한국의 탈춤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썼을 정도로 한국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1968년 한국 유학을 결심하고 연세대 국문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당시 그는 “한국이 좋다. 한국문화를 공부하며 영원히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가족에게 자주 했다. 유학 도중 일본에 잠시 귀국했을 때조차 직접 김치를 담가 먹었을 정도. 석사과정을 마친 후 그는 한국 국제대 일본문학 강사로 일하게 됐고 아예 한국에서 살 결심을 했다.

사랑이 깊으면 시샘도 커지는 탓일까? 1972년 2월 1일, 폭우가 내린 날 오사카(大阪)로 향하던 고속도로에서 그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다. 한국에서 살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스물아홉의 나이로…. 함께 한국에서 살기로 한 아내와 결혼한 지 70일, 강의를 위해 한국에 오기 일주일 전이었다.

○아버지의 한국사랑

아버지에게 아들의 죽음은 이기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상심의 나날을 보내던 도시오는 두 달 후 아들의 유해를 한국에 묻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족들은 “당시 아버지는 ‘아들이 일본인이어서 무덤 쓸 땅이 없다면 한강에라도 유해를 뿌리고 오겠다’고 하셨다”고 밝혔다.

마침 국제대가 요절한 후미야를 대신해 아버지에게 강의를 부탁했고 와세다(早稻田)대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한 도시오는 이를 수락했다. 그리고 아들의 유골을 가져와 서울 근교에 묻었다. 1990년대 초 사망한 아내 역시 아들 옆 자리에 묻었다.

아들을 대신한 삶은 2000년까지 이어졌다. 도시오의 이웃이었던 곽태호(75) 씨는 “‘한국에 있으니 몸이 다 좋아진다’고 할 만큼 한국을 많이 사랑했다”고 말했다.

1910년생인 도시오는 2000년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홀로 한국을 왕래하곤 했다. 그는 2004년 12월 세상을 떠나며 “죽으면 뼈의 일부를 한국에 있는 아들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올 6월 결국 아들 옆에 눕게 됐다.

도시오 가족은 이달 초 부자가 수집했던 근대기 일본 전통연극 관련 도서, 한국연극 민속자료 등 1400여 권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기증했다. 30여 년을 이어온 부자의 ‘한국사랑’의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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