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직업]페레그린의 풍운아 안드레 리

  • 입력 1998년 2월 23일 17시 56분


《안드레 리(35). 한국명 이석진(李奭鎭). 지난달 12일 파산, 아시아 금융계를 뒤흔든 세계적인 투자회사 페레그린의 채권담당사장이었다. 영화 ‘스피드’의 주인공 키아누 리브스를 연상케 하는 외모에 홍콩 금융계에서 손꼽히던 선두주자. 명문가출신의 한국인 아버지에 프랑스계 캐나다인 어머니. 홍콩 금융계의 스타로부터 페레그린 파산 주역(?)으로의 전락…. 이때문에 그는 한국에서도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진’ 인물이 돼버렸다. 부친(이기창·李基昌·63·변호사)을 만나러 잠시 서울에 온 그를 어렵게 인터뷰해 뒷얘기를 들어봤다.》 “파산후 한달여 홍콩에 남아 페레그린의 청산작업을 도왔습니다. 피해를 본 투자자들, 특히 함께 고생했던 동료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허탈감이 크지만 큰 공부를 한 만큼 다시 일어서야죠.”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만 서울의 외국인학교에서 마쳤을 뿐 대부분의 교육은 미국에서 받았다. 85년 미국 뉴욕주 콜게이트대 졸업. 철학과 종교학 전공. 처음 미국회사인 리만 브라더스의 홍콩지사에서 일하다 94년 페레그린에 스카우트됐다. 함께 옮겨온 14명의 채권팀은 작년 8월 2백20명으로 커질 만큼 승승장구했다. 10여개 자회사에 직원 2천여명이던 페레그린의 95년과 96년의 순이익 중 35%를 그가 이끄는 채권팀이 일궈냈다. 필립 토즈 페레그린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금융경력 7년만에 실질적인 2인자 자리에 올랐다. 4년간의 개인소득만도 1천만달러나 됐다. “채권팀 출범 후 1년간 우리팀이 회사근처 맥도널드에서 아침을 햄버거로 때운 날이 3백일이 넘습니다. 아침 7시에 문을 연 곳이 그곳 뿐이었으니까요. 하루 15시간씩 미친듯이 일했습니다.” 국제 채권시장을 지배하는 세계굴지의 기업들에 비하면 덩치가 작은 편인 페레그린의 생존전략은 무엇이었을까. “페레그린은 ‘아시아지역 투자전문’을 지향했습니다. 회사의 모든 연구 분석능력을 아시아 시장상황에 집중했어요. 문화와 전통이 거래에 미치는 관습까지도. 아시아를 ‘여러 시장중 하나’로 여긴 미국 유럽계 투자은행보다 탄탄한 전략마련이 가능했습니다.” 그의 하루일과는 ‘정보와의 전쟁’이었다. “출근하자마자 간밤의 외국시장 상황을 파악합니다. 이어 트레이딩룸에서 도쿄(東京) 자카르타 서울 등 각 지사와 오디오회의를 갖고 의견을 교환합니다. 이후로도 끊임없는 전화통화와 5분미팅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거래전략을 짭니다.” 하루에도 10번 이상의 회의를 하면서 지킨 원칙이 하나 있다. 일상적인 미팅은 10분을 절대 넘기지 않는다는 것. “짧은 시간에 자신의 견해를 간명하게 전달하고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능력부족입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돌파력을 겸비한 전략가’라고 묘사했다. 그는 자신의 시황분석 내용을 정기적으로 사내 전자우편에 띄웠는데 이 ‘안드레 메모’ 역시 깔끔한 논리전개로 회사에서 최고 인기였다. 그의 이같은 안목과 추진력은 어디서 왔을까. 안드레 리는 어려서 자주 찾았던 ‘안국동 할아버지’댁에서의 기억을 소개했다. 그가 말하는 할아버지는 친할머니의 오빠인 고(故) 해위 윤보선(海葦 尹潽善) 전대통령. “당시 가택연금 중이시던 할아버지는 늘 짙은 양복차림에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을 하고 계셨습니다. 조용했지만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치열함을 느낄 수 있었지요. 흑백사진처럼 머리속에 박힌 그 모습은 항상 제 삶의 자세를 돌이켜보게 합니다.” 해방후 외교관 1세대로 주프랑스공사 발령을 받은 상태에서 6.25때 납북된 이능섭(李能燮)씨가 그의 조부. 언론인의 정도를 걸어왔던 홍승면(洪承勉) 전동아일보편집국장은 그의 고모부다. ‘국제인’인 그의 가슴속에는 ‘민족애의 더운 피’가 면면히 흐르는 셈이다. 〈김승련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