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회장 기아인생 40년]「봉고 신화」장본인 불명예퇴진

  • 입력 1997년 10월 29일 20시 13분


한때 「한국의 아이아코카」로 불리던 김선홍(金善弘)회장이 29일 끝내 「기아호」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7월15일 부도유예협약 적용이후 퇴진을 거부하며 「제2의 봉고신화」를 자신했던 김회장은 정부의 압력에 이어 검찰의 비리 내사라는 결정타를 맞고 끝내 40년 기아인생을 접었다. ▼김회장의 기아인생〓서울대 기계공학과 출신인 김회장은 지난 58년 당시 기아산업(기아자동차의 전신) 공채1기로 기아 인생을 시작했다. 기아 창업주인 고 김철호(金喆浩)회장 지시로 73년 경기 광명시 소하리 23만평 대지에 국내 최초의 일괄공정 시스템을 갖춘 종합자동차공장을 건설했다. 81년 10월 1차 오일쇼크와 불황에 이어 정부의 자동차공업합리화 조치로 거의 빈사 직전의 기아자동차 사장으로서 그가 내놓은 것은 봉고였다. 1t짜리 트럭을 12인승 승합차로 개조한 봉고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82년에는 일본의 마쓰다, 미국의 포드와 손잡고 대표적인 국민차인 프라이드를 탄생시켰다. 이어 84년 아산만공장 건설에 나선 김회장은 지난 90년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으로는 처음으로 30대 그룹회장에 올라섰으며 지난해 기아를 자산기준 재계 8위로 성장시켰다. ▼김회장의 공과〓70년대말 위기에 봉착한 기아자동차를 재건하고 국내 초유의 오너없는 대그룹을 일궈내 한국 경영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이 대표적인 공로. 또 자체 기술력으로 자동차 엔진을 개발하고 인도네시아 국민차사업 진출 등 국내 자동차 산업을 한단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80년 이후 무리한 사업확장과 신규사업 진출로 기아그룹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특히 기아의 부도유예협약 적용이후 경영권에 집착해 조건부 화의 등 타협책을 모두 거부, 극한 대립으로 치달아 국내 경제에 충격을 주는 등 오점을 남겼다. 〈박현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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