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유근형]베르사유에서 트럼프가 프린트기를 찾은 이유

  • 동아일보

유근형 파리 특파원
유근형 파리 특파원
“80세를 맞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생일잔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끝난 뒤 트럼프 대통령을 베르사유 궁전에 초청하겠다고 하자 유럽 외교가 안팎에선 이 같은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관세 폭탄’을 들이밀며 사사건건 유럽을 불쾌하게 해온 트럼프 대통령에게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이자 태양왕의 무대인 베르사유 궁전을 통째로 내주는 게 굴욕이자 아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베르사유 생일파티 카드는 G7 정상회의에서 언제 떠날지 모르는 트럼프를 묶어두기 위한 히든카드였다. 수백 년의 역사가 깃든 화려한 궁전과 융숭한 의전에 약한 트럼프의 성향을 파악한 맞춤형 외교였던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초청으로 런던 윈저성을 방문해 특급 대우를 받고 “진정 내 인생 최고의 영예”라며 만족감을 표시하지 않았던가. 마크롱 대통령은 “홈이든 원정이든 골만 넣으면 된다”며 다소 우스꽝스러운 무대 세팅을 완료했다.

이란 종전 MOU 급조 돌발 서명식

‘베르사유 만찬’에선 실제로 전례 없는 기묘하고 파격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베르사유 궁전의 핵심인 거울의 방을 둘러보며 마크롱 대통령에게 이란과의 종전을 위한 양해각서(MOU) 타결 사실을 알렸다. 프랑스 왕들을 흉내 내고 싶어서였을까. 그곳에서 서명하겠다는 뜻도 즉흥적으로 밝혔다. 19일 스위스에서 이란과의 MOU 서명 행사가 거론되던 상황이라 프랑스와 미국 실무자들은 당황했다고 한다.

급조된 서명식을 위해 오후 11시가 넘은 시각 프랑스 외교관들은 프린트기를 구하기 위해 궁과 주변을 뒤졌다. 결국 인쇄된 A4용지 몇 장으로 급조된 문서가 만찬장에 공수됐다. 종이를 받치는 서명판조차 없었다. 만찬장 테이블이 갑자기 정리되고 돌발 서명식이 진행됐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30여 명의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서명을 마친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나갔다고 한다. 최소 7000명이 죽고 글로벌 경제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이란 전쟁을 끝내기 위한 MOU 서명이 최소한의 외교적 무게감조차 상실한 분위기 속에,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의 ‘쇼’로 일단락된 것이다.

전 세계 취재진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MOU 체결 장소와 시간은 시시각각 변했다. 많은 기자들이 불확실한 정보를 따라 스위스 제네바로, 뷔르겐슈토크로 이동해야 했는데, 결국 19일 행사 자체가 취소됐다.

형식 가벼움이 내용 불신으로 이어질 우려

더 큰 문제는 형식의 부실함이 내용에 대한 불신으로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MOU 쇼비즈니스’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은 “문서화되지 않은 신사협정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MOU 성과를 부풀리기 위한 수사였지만 언제든지 그 내용들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실제 합의 내용이 하루 만에 부정되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MOU 체결 하루 뒤 레바논 남부에 대한 공습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베르사유에서 급조된 A4용지 한 장의 문서가 구속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의문을 키웠다. 그 여파로 19일로 예정됐던 첫 실무협의는 연기됐다.

‘베르사유 프린트기 촌극’은 트럼프 시대의 ‘외교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디까지가 실제 합의이고, 어디부터가 정치적 수사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헐거운 MOU도 문제지만, 더 큰 위험은 합의 자체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불안정성에 있다.

트럼프 시대에 미국과의 외교와 협상에선 이전보다 훨씬 냉정하게 실제 이행 가능성을 짚어봐야 한다는 것을 이란 전쟁과 MOU를 통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일단 골부터 넣고 보자’는 식의 즉흥적 접근에 대해 ‘비디오 판독(VAR)’을 통해 득점 여부를 끝까지 확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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