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행주대교 아래를 거닐었으나, 겸재 정선이 봤다는 풍경은 온데간데없다. 정선은 1740년부터 5년간 양천현령을 지내며 한강과 주변 명승지를 그린 ‘경교명승첩’을 남겼다. 그중에 행주산성 부근 행호의 풍경을 그린 ‘행호관어도’가 있다. 그림에는 행주산성 주변 풍경과 14척의 웅어잡이배가 담겨 있다. 당시 웅어잡이 중심지는 한강과 창릉천이 만나는 행호였다. ‘행호관어도’에 실려 있는 이병연의 시에도 행호에서의 웅어잡이 장면이 묘사돼 있다. “늦봄에는 복엇국/초여름에는 웅어회라/복사꽃 가득 떠내려오면/행호에 그물질 바쁘네.”
위어(웅어)와 소어(밴댕이)의 공급을 위해 사옹원에 ‘위어소’와 ‘소어소’를 뒀다. 고양, 교하, 김포, 통진, 양천에 위어소를 설치했는데, 행주나루(양천)에 있던 위어소가 가장 번창했다. 궁중에서는 위어소에서 보낸 웅어를 받아 회로 먹거나 젓갈을 담갔다. 위어소 소속의 어부는 300호 정도였다. 웅어잡이 어부에게는 병역과 각종 부역을 면제해 주고 토지 8결씩을 지급했다. 임진왜란 후 웅어잡이 어민의 삶은 곤궁해졌다. 1618년 4월의 ‘광해군일기’에는 “웅어잡이 가구는 겨우 100호이며, 이들이 받는 토지는 2결 정도다. 웅어잡이 외에 땔감이나 집 짓는 재목감 부역에도 동원되니 힘들다. 다른 부역에는 동원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웅어에 관한 일을 맡아 주관하는 관청을 두고, 어민에게 각종 혜택을 제공하면서까지 웅어를 특별 관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의문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웅어 맛은 높이 평가됐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웅어는 한강의 것이 가장 좋다. 호남에서 2월이면 잡히고, 관서지방에서는 5월에야 잡히는데 모두 맛이 좋다”고 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맛이 지극히 달고 진하여 횟감 중에서 상품이다”라고 했다. 맛에 대한 이 정도 평가는 당시 가장 많이 잡힌 조기, 명태, 청어도 다를 바 없었다.
각종 문헌에서는 조기, 명태, 청어가 맛있고 값이 싸 가난한 백성에게 귀한 생선이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왜 유독 웅어와 밴댕이만 특별 관리 대상이었을까. 두 어종은 잔가시가 많아 먹기 불편하고, 살도 많지 않으며, 맛도 싱거운 편이다. 다른 생선에 비해 특출나게 맛있는 생선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유는 단순하다. 궁궐과 가까운 곳에서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구하기 쉽고 궁중까지 운반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잡은 웅어는 서빙고의 얼음에 재워 빠르게 궁궐로 운반했다. 궁중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한 횟감용 생선이 웅어였던 셈이다. 한양의 양반들도 웅어는 그나마 쉽게 접할 수 있는 횟감이었다.
바닷물고기인 웅어는 연안 가까이에서 살다가 늦봄에서 초여름에 강으로 오른다. 웅어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조강을 거쳐 통진 수계와 김포 수계를 거슬러 올라 행주산성 인근의 갈대밭에 산란했다. 갈대밭에서 잘 잡혀 ‘갈대 위(葦)’ 자를 써서 위어라고 했다. 지금은 신곡수중보가 설치돼 있어 행주나루까지 웅어가 오를 수 없다. 아니, 행주나루까지 오를 웅어가 없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웅어의 흔적을 찾아 행주대교 아래를 거닐었으나 헛걸음이었다. 인근 횟집에서 웅어회를 포장하면서 산지를 물었더니 전남 목포에서 잡은 웅어를 쓴단다. 한강에서 웅어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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