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23〉

  • 동아일보

그해 겨울 나는 불행의 셋째 딸이 되었어요. 언니들은 하얀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되었지요. 나는 맨발로 눈이 쏟아지는 벌판을 달려요. 총총한 별들과 검은 돌멩이 같은 염소들 파랗게 울고 있는 벌판에서 나는 갓 태어난 늙은 아버지에게 흰 젖을 먹이고, 밤의 긴 머리카락으로 그의 얼굴을 씻깁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마을로 돌아가요. 막 불행의 결혼식이 시작됩니다.

―이기성(1966∼ )


새해 아침에 행운과 불행, 복과 덕 같은 단어를 생각한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이 말들은 다 무엇일까? 일본에서는 말에 깃든 힘을 믿는 신앙이 있는데, 이를 ‘고토다마(言靈)’라 부른다. 시를 쓰는 일은 무엇보다 말의 힘을 믿는 일이다. 그렇다면 시를 읽는 일은 언(言)의 혼(魂)을 내면에 간직하는 일이 아닐까?

이기성 시인은 ‘불행’에 주목한다. 시집에 같은 제목의 시가 몇 편 더 실려 있다. 그는 불행을 직시하고 해부하며 불행을 새롭게 변모시킨다. 그 과정이 아름답다. 불행은 전형성에서 벗어나 있다. 시인의 상상력으로 몸을 바꾸고 도약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부피를 가진다. 불행은 기다란 깃털을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겨울새처럼 보인다.

화자는 불행의 셋째 딸이다. 아마도 불행의 첫째와 둘째일 “언니들”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할 준비를 한다. 그는 ‘불행’ 그 자체일 아버지를 씻기고 먹여 결혼식에 참석할 준비를 한다. 물론 이것은 모조리 은유다. 아버지는 “갓 태어난” 늙은 불행일 뿐이다. 상상해 보라. 불행의 셋째 딸이 뛰어가는 눈밭, 웨딩드레스, 곧 시작될 불행의 결혼식……. 막 도착한 불행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이것은 시의 일, 언어가 혼신을 담아 종이에 안착하는 일이다.

#불행#시#이기성#언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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