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원종원]K콘텐츠, 유행을 넘어 브랜드로 자리매김해야

  • 동아일보

‘EGOT’ 잇단 성과로 K콘텐츠 최대 전성기
관광, 소비로 이어지며 세계서 영향력 체감
개인 재능에 의존하면 일시적 유행에 그쳐
창작자 성공경로 설계해 ‘흐름’ 만들어내야

원종원 순천향대 미디어랩스대 학장·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순천향대 미디어랩스대 학장·뮤지컬 평론가
‘에고트(EGOT)’라는 말이 있다. 미국 문화산업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들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다. TV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하는 에미(Emmy), 음악의 그래미(Grammy), 영화의 오스카(Oscar), 그리고 연극이나 뮤지컬 등 무대예술에 주어지는 토니(Tony)상이 그것이다. 최근 에고트에서 K콘텐츠의 활약이 세계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의 낭보에 이어 올해 전반기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토니상 6관왕에 오르더니, 내년 2월 시상하는 그래미상에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제가 ‘골든(Golden)’이 4개 부문 후보에, 그리고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APT.)’가 3개 부문 후보로 지명돼 수상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이고 있다. 가히 K컬처 전성기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해외 출장을 가거나 인파가 많은 도심을 걷다 보면 K콘텐츠의 세계적 인기가 가져온 변화에 놀랄 때가 많다. 명동이나 광화문 등 서울 도심의 주요 거리는 이미 외국인 방문객들로 모습을 뒤바꾼 지 오래다. 맛집이나 노점상, 기념품이나 화장품을 파는 상점들은 대부분 중국어나 일본어로 호객 행위를 한다. 2025년 한국을 찾은 관광객은 187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는 전년 대비 약 15% 늘어난 수치로 역대 최대 규모다. ‘케데헌’의 인기에 힘입어 국립중앙박물관의 방문객 역시 역사상 처음으로 연간 6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굿즈 매출은 2배 이상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수도 런던의 번화가 중 한 곳인 토트넘 코트 로드도 마찬가지다. 딤섬이나 크리스피 덕을 주로 취급하던 차이나타운 주변 상가에 한국 식료품을 파는 대형 슈퍼마켓이 세 곳 이상 늘어났다. 고객 대부분은 교민이나 유학생들이 아닌 파란 눈의 현지인들이다. 제일 인기 있는 상품은 즉석 컵라면이다. 유튜브 등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매운맛 챌린지’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떡볶이나 김밥을 파는 분식집 앞에서는 줄을 길게 늘어선 대기 손님들도 쉽게 접할 수 있고, 한국식 프라이드치킨과 맥주를 파는 ‘치맥집’도 북새통이다.

프랑스 파리 에펠탑 인근 풍경도 엇비슷하다. 한국식 BBQ 레스토랑들이 연일 손님들로 만원을 이루는가 하면, 한국 식자재를 파는 슈퍼마켓 여점원은 능숙하게 우리말로 계산을 돕는다. 궁금해 말을 건네 보니,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를 보며 독학으로 배웠다며 웃는다. 세계 각국의 젊은 세대에게 K콘텐츠가 어떤 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늘 이래 왔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우리 뮤지컬의 런던 공연 당시, 현지의 유명 일간지에 실린 무례한 리뷰가 관계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이 작품은 식당 메뉴판에서 개고기를 발견할 수 있는 나라에서 만들어졌다. 이미 런던은 세계에서 온 미친 공연들로 넘쳐나지만, 이 작품이 보여준 용기에는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다.” 문화적 편견과 오만함으로 가득 찬 콧대 높던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그야말로 180도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요즘의 풍경이 오랫동안 이 분야를 다뤄 왔던 필자에게는 사실 놀랍다. K콘텐츠가 이뤄낸 말 그대로 기적 같은 변화다.

하지만 그저 반갑고 즐겁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K콘텐츠가 가져온 변화의 흐름을 일시적 유행이 아닌 도도한 물줄기로 유도하고 확장시켜야 한다. 제2, 제3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기 위한 정책과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몇몇 천재적인 예술가의 우연한 성취가 아니라, K콘텐츠 양성을 위한 체계적인 지원과 축적된 시스템이 낳은 당연한 결과여야 한다. 창작자가 안정적으로 도전하고 실패를 통해 성공을 꿈꿀 수 있는 제반 여건과 토양, 산업과 예술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국제적인 경쟁력도 지속될 수 있다.

지방을 단순한 문화의 소비시장이 아닌 시발점으로 여기는 사고의 변화도 있어야 한다. 지방에 예술가가 상주하며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주거와 작업 공간, 제작 여건이 뒷받침돼야 한다. 지역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서울 등 수도권에서 더 큰 기회를 얻고, 대도시에서 성과가 쌓이면 다시 세계 시장으로 도전할 수 있는 단계적 사다리를 설계해야 한다. 이러한 성공의 경로가 완성되고 사례가 축적될 때 K콘텐츠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한국 문화산업의 인기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 K콘텐츠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에고트#K콘텐츠#케이팝#한국 문화산업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