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원-달러 환율의 이상 급등세를 보며 문득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뱅크런 사태가 떠올랐다. 2023년 3월 실리콘밸리 일대 핵심 은행이 미국 역사상 두 번째 규모로 파산한 사건이다. 세계가 경악한 것은 역대급 파산 속도였다. 자금 이상 신호가 감지된 지 불과 36시간 만에 초고속 파산했다. 전례가 없던 일이다.
과거와의 결정적 차이는 ‘기술의 진화’에 있었다. 소셜미디어는 공포를 빛의 속도로 전파했고, 고도화된 디지털 뱅킹 시스템은 순식간에 62조 원이 빠져나가는 ‘클릭 뱅크런’을 현실화했다. 기술 진화가 금융 변동성을 증폭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극단적 사례다.
韓 소셜미디어의 ‘원화 탈출’론
최근 원화 약세, 즉 환율 급등이 공포에 기반한 ‘원화 런’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환율 상승세는 3년여 지속된 한미 금리 역전 현상, 저성장 장기화 등 구조적 요인이 크다. 하지만 디지털 투자 시스템 정착과 소셜미디어 여론 쏠림 현상이 최근의 환율 변동성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SVB 사태와 닮은 구석이 있다.
올 초 현대경제연구원이 분석한 한국의 ‘균형환율’(경제 상황을 감안한 적절한 통화 가치)은 2022년 말 1179원에서 2024년 말 1351원으로 상승했는데, 실제 환율은 이보다 지속적으로 높았다. 적정 가치보다 원화가 더 싸게 거래되고 있다는 의미다.
원화가 실제보다 평가절하되는 간극에는 시장의 비관론이 있고, 비관론은 소셜미디어에서 더욱 증폭되고 있다. 소셜미디어상에는 ‘원화가 녹고 있다’는 말이 일상어가 됐고, 원화 약세 전망은 하나의 ‘믿음’처럼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이슈에서 나타나는 확증 편향 현상이 자본 시장에서도 나타나는 셈이다.
소셜미디어의 여론 쏠림이 시장에 실시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실증 연구로 확인됐다. 콜로라도 볼더대 J 앤서니 쿡슨 교수팀은 ‘뱅크런 기폭제로서 소셜미디어’라는 2023년 논문에서 SVB 사태 당시 트위터(현 엑스) 데이터를 분석했다. 위험이 제기됐을 때, 트윗이 수분 단위로 주가 하락과 뱅크런으로 이어지는 ‘초고속 디지털 전염’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투자 결정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디지털 금융 시스템도 환율이 꾸준히 상승해 온 최근 5년 새 정착된 것이다. 2020년 이후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과 환전 없이 주문 가능한 해외주식 통합증거금 시스템이 대세가 됐다. 시간 장소 구애 없이 누구나 해외 자산을 사고팔 수 있게 되면서 700만 서학개미가 외환시장의 새로운 플레이어로 떠올랐다. 과거에는 환율이 특정 선을 넘으면 ‘균형’으로 돌아올 것이란 전망에 달러를 팔겠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더 오를 테니 지금이라도 사야 한다’는 포모(FOMO)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기술이 야기하는 변동성의 뉴노멀
외환 당국은 구두 개입에 나서고 국민연금·수출기업·증권사와 대책을 협의하고 있지만 원-달러 환율은 4일에도 1470원대로 올랐다. 과거 정책이 지금의 시장에 잘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심지어 미국의 금리 인하 기대감조차 교과서적인 예측을 빗나간다. 금리 차 축소는 원화 강세 요인인데, 오히려 미국 증시 강세가 더 커져 글로벌 자금이 미국으로 쏠리고 있다. 이는 원화 약세로 돌아온다.
기술이 만드는 변동성 증폭 현상은 앞으로의 뉴노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AI)이 투자 결정을 실시간으로 대신하거나, 스테이블코인이 일상화되면 자금 이동의 속도는 극단적으로 빨라질 것이다. 변동 요인이 강해질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한국 경제 펀더멘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변동성을 줄이는 첫 단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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