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원잠) 연료 요청을 미국이 거절했다는 것을 2020년 처음으로 동아일보에 확인해 준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인사는 말투도 표정도 싸늘했다. “미국은 그 어떤 나라에도 핵잠수함 연료를 판매하거나 넘기지 않는다”는 훈계조의 설명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단호함이 깔려 있었다. 그랬던 미국이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호주에 원잠을 지원한다는 발표를 했을 때 한국 기자로서 느꼈던 배신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같은 동맹인데 다른 결정이 나온 이유가 뭔가. 당시 워싱턴의 몇 인사가 내놨던 설명은 “같은 인종으로 서구 문화와 가치를 수백 년간 공유해 온 호주와는 상호 신뢰의 강도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예외는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원잠 확보, 일사천리 진행 기대는 성급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한국의 원잠 승인을 받아낸 것은 놀라운 변화다. 역내 안보 구도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미국도 기존 원칙을 마냥 고수하긴 어려웠겠지만, 행정 관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핵 비확산의 원칙을 다시 깬 것은 트럼프라는 지도자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다만 그의 말 한마디로 한국의 오랜 숙원이 일사천리로 풀릴 것이라는 기대는 성급하다. 공동 설명자료(joint factsheet) 발표가 차일피일 미뤄지는 것부터가 심상찮다. “원잠 관련한 협의 과정에 이견이 있다”는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에 비춰 볼 때 내부 비확산론자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핵 문제만큼은 국무부 비확산국과 에너지부 산하 핵안보국 등 여러 부처가 겹겹이 통제의 장벽을 쌓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비확산 마피아’ 혹은 ‘핵 문지기’로 불리는 행정부 인사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고 질기다. 이들은 동북아에서 한국, 일본, 대만 등으로의 핵 도미노 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하다.
팩트시트보다 구속력이 높은 정상들의 공동성명으로 미국의 원잠 지원을 못 박았던 호주조차 쉽지 않았다. 오커스(AUKUS) 정상들의 호기로운 발표 후 미국이 관련 내용을 담은 국방수권법을 통과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2년 3개월. 핵물질이나 기술을 군사적 목적으로 제3국에 이전할 수 없도록 한 미국 원자력법의 예외 조항을 만드는 것부터 난항이었고, 그 과정에서 수차례의 보안 검토가 반복적으로 이뤄졌다. 호주 내에서는 “동맹을 못 믿는 것이냐”는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도 커졌다. 동맹을 강화시켜야 할 잠수함 협력이 동맹을 흔드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난항 지속됐던 호주 전례 재연될 수도
이런 과정을 앞서 겪은 호주가 간신히 핵 비확산의 금기를 풀었다고 해서 다음 차례인 우리가 더 쉬워진다는 보장은 없다. 비슷한 과정을 밟아 나가는 과정에 어떤 국내외적 변수가 돌출할지 알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전임 바이든 행정부에서 이뤄진 결정이라는 이유로 오커스 동맹에 대한 재검토를 진행하기도 했다. 정권 교체에 따라 국가급 프로젝트가 뒤집힐 가능성이 있음을 환기케 한 조치였다.
정부는 이런 전례를 살펴가며 워싱턴 여론전부터 미국 의회 설득까지 단계별 길목을 잘 뚫어야 한다. 상·하원 외교, 군사위원회를 상대로 집중 로비에 나선 호주의 고위 당국자들이 막판에 워싱턴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밀어붙였던 시도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잠은 최종적으로 손에 넣기까지 10년을 각오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이지만, 천천히 갈 여유는 없다. 팩트시트 발표는 시작이다. 원잠 프로젝트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밀어 올리는 게 더 큰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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