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일 경희대 회계·세무학과 교수국가가 혼란할 때면 애국지사들이 넘쳐난다. 19세기 중반 일본 개항기에도 외세를 배척하자는 이들과 개방을 해야 한다는 이들, 막부를 지켜야 한다는 이들과 타도해야 한다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다툼을 벌였다. 각자의 정의를 내세우고 칼을 뽑았다. 부유한 농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에 재능을 보였던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1840∼1931)도 천대받는 상인의 신분일지언정 일생을 사회 발전에 바치겠다는 뜻을 품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치며 막부 타도를 목표로 동료들과 성을 습격하려던 그는, 난을 일으켜도 세상에 이익이 되지 않고 뜻을 알아주는 이조차 없으리라는 주변의 설득으로 히토쓰바시 가문의 가신이 된다. 그런데 주군이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되는 바람에 도리어 막부의 일원이 됐다.
시부사와는 1867년 프랑스 만국 박람회에 참석하는 쇼군의 동생을 수행하며 눈을 떴다. 상공업 발전의 중요성을 깨닫는 한편으로 벨기에 국왕이 직접 철강 구매를 권하고 은행가가 장교와 대등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귀국 후 메이지 정부 대장성 관료로 활동하며 도량형 개정, 조세 개혁, 화폐 개혁, 철도 부설, 국립은행 조례 제정 등을 추진했다. 특히 서유럽 발전의 비결이 주식회사와 은행 제도라고 생각하여 주주의 유한책임, 소유와 경영의 분리, 주주 평등의 원칙, 주주·대표·이사의 역할을 명확히 설명한 입회약칙(立會略則)을 펴냈다.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그는 늘 자신의 소명은 사업에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상급자의 방만한 재정 운영을 비판하며 충돌하고, 정부가 아무리 제도를 만들어도 현재의 상인들로서는 일본의 상공업을 진보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직접 실업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873년 사임한다.
그는 일본 최초의 근대적 은행이자 주식회사인 제일은행을 설립하고 초대 은행장이 됐다. 이후 77세까지 은행을 경영하며 도쿄주식거래소, 상공회의소, 제국호텔, 도쿄전력, 도쿄가스, 도쿄제철, 삿포로 맥주, 오지 홀딩스 등 500여 개 기업의 설립과 운영에 기여했다.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경영교육을 위한 상법강습소(현 히토쓰바시대), 오쿠라상업학교(현 도쿄경제대), 여성 교육을 위한 일본여대, 빈곤 구제를 위한 도쿄양육원 등 600여 개 단체 설립에도 힘썼다.
시부사와는 ‘논어와 주판’에서 경제와 도덕은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정당하고 윤리적으로 얻은 부는 진정한 부이자 마땅한 것이며, 상인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공익을 생각해야 함을 강조했다. 사업가가 존경받는 사람이 돼야 유능한 인재들이 모이고 사회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벽은 줄어들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부사와의 활동과 뜻이 모두에게 각광받았던 것은 아니다. 이상주의적이라거나 ‘도덕 타령’이라는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2024년 시부사와는 계몽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뒤를 이어 일본의 최고액권인 1만 엔권 지폐의 주인공이 됐다. 사혼상재(士魂商材), 즉 도덕성과 윤리의식, 그리고 실용주의적 사고와 경영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그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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