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초대석]“尹의 ‘나는 희생자-상대는 절대악’ 음모론 전략, 공적 신뢰 붕괴시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19일 23시 18분


‘음모론의 시대’ 저자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尹의 편집증적 음모론 정치
합리적 증거도 오염됐다 믿고 상대 증오 이용해 책임 전가
정치적 음모론의 세상엔 ‘선한 우리 편’과 악마만 존재
생사투로 변한 정치가 음모론 토양
치유 힘든 ‘윤석열의 유산’ 두고 오랫동안 싸워야 할 것

15일 서울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난 전상진 교수는 “음모론 정치 전략의 가장 큰 특징은 정치적 적을 경쟁 상대가 아니라 원수, 악마로 규정하고 이들을 없애야 한다며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것”이라면서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지 못하는 생사투로 바뀐 정치가 음모론이 자랄 토양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증오에 휩싸인 편집증자. 박해 망상과 자기 맹신 성향이 있다. 망상을 뒤엎는 합리적 증거가 밝혀져도 증거 자체가 오염됐다고 믿는다. 자신이 위협받으며 부당하게 비난받고 있다고 믿는다.” 2014년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가 펴낸 ‘음모론의 시대’에서 규정한 음모론자의 특징이다. 편집증은 상대에게 적의가 있다고 맹신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망상 장애를 뜻한다. 15일 오후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난 전 교수는 “증거가 없는 부정선거 음모론을 여전히 12·3 비상계엄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강변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모습과 겹친다”고 말했다. 그는 “음모론자에 대한 이 정의는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1964년 저서 ‘미국 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에서 제시한 내용”이라고 말했다. 호프스태터는 당시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배리 골드워터를 주목했다. 골드워터는 미국이 온통 좌파의 음모로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으로 극우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호프스태터는 “거대한 음모가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며 이를 막아낼 수 있는 건 ‘십자군 전쟁’뿐이라고 주장하는 골드워터의 모습을 편집증적 스타일의 정치라고 지적했다. 15일은 윤 대통령이 체포된 날이었다. 전 교수는 11년 전 음모론 관련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주변에서 “음모론을 믿는 거냐”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고 여전히 음모론 연구가 척박한 수준이지만 윤 대통령이 현실의 극적 사례를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음모론의 시대’ 후속으로 ‘대통령의 편집병’(가제)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윤 대통령에게서 보인 편집증적 정치 스타일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전능한 적과 대적하고 있다, 그 적으로부터 부당하게 피해와 박해를 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며 대통령임에도 현 제도에 대한 불신을 보였다. 이런 인식이 불법을 포함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적)과 싸움을 벌여도 된다는 인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왜 하필 부정선거 음모론인가.

“제도에 대한 음모론자의 불신은 두 가지 부류다. 하나는 제도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제도를 자의적으로 활용한 경험이 있어서 상대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맞춰 그 제도를 좌지우지한 경험이 있는 후자로 보인다. 검찰 수사에서 명태균 씨의 여론조사 조작 의혹이 드러난 게 그 단서다. 윤 대통령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 야당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부정선거의 증거가 없다고 아무리 밝혀도 오염된 증거라고 주장하며 부정선거 믿음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모든 정보가 집중되니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나.

“윤 대통령은 그런 선택보다 대부분의 정책에 카르텔이라는 적을 상정했다. 반국가세력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정책을 왜곡하고 방해하는 거대한 세력, 모든 사회 영역에서 가면을 쓰고 암약하는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고 자신을 고립된 피해자로 규정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성공하지 못해도 강력한 용과 대적했다’며 정책 실패를 정당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인식이 결국 계엄이라는 국가 범죄로 나타났다.”

―음모론의 공식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인가.

“정치적 음모론자들은 상대를 음모 세력으로 악마화해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한다. 자신을 희생자로 만든 뒤 악마를 없애야 한다면서 지지자들을 동원한다. 음모의 세상에는 두 진영만이 존재한다. 절대적으로 선한 ‘우리’와 절대악의 이분법이다. 상대에 대한 증오를 이용해 책임을 전가한다. 윤 대통령에게 음모론은 정치 전략이었고 지금도 의존하는 유일한 정치적 자산으로 보인다.”

―책에선 린든 존슨 전 미국 대통령 사례를 들었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으로 지지율이 높아졌다가 전쟁 참상 고발 등으로 지지율이 떨어졌다. 언론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는 정책을 수정하는 대신에 ‘미국의 거대한 음모 집단이 나를 망치려 이런 식으로 조작하고 있다’며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다.”

―21세기 한국 정치에서 이런 음모론이 통하는 이유는….

“상대 진영에 대한 미움을 바탕으로 하는 ‘안티 팬덤’ 정치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 정치는 누군가가 리더로 적합해 뽑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혐오해 그 사람을 비토하기 위해 리더를 택한다. 음모론의 가장 중요한 정치 전략은 정적을 경쟁 상대가 아니라 원수이자 악마로 본다. 타협과 대화가 불가능하다. 정치가 ‘저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사투가 돼 버린 것이다. 이는 음모론이 무럭무럭 자랄 최적의 토양이 됐다. 우리 편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적진 앞에서 분열하면 우리가 죽는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북돋아줘야 한다는 식이다.”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당시 한남동 관저에 계속 모여드는 이유를 묻자 전 교수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 얘기를 꺼냈다. 페스팅거는 1950년대 이른바 ‘종말의 날’을 믿은 종교 집단을 연구했다. 그 결과로 펴낸 책이 ‘예언이 끝났을 때’다. 종말의 날에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자 어떻게 됐을까. 다들 집단을 떠났을 것이라 믿으면 오산이다. 상당수가 집단에 남아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포교에 나섰다.

―왜 그런 건가.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때까지 자신들이 투자했던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 충성과 헌신이 아까웠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현실보다 중요하게 생각했고 믿음을 지키는 쪽으로 현실을 바꿨다. 이러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친해지고 자신의 믿음을 지지해주는 정보만 편식하게 된다. 망상의 세계에 빠졌다는 건 곧 자신의 잘못된 신념, 생각이 현실과 충돌할 때 현실을 믿음에 맞게 왜곡시켜 본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개념이 인지부조화다. 음모론자들은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려 음모론을 채용하는 것이다.”

―그런 음모론을 믿는 윤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비정상적인가.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기여한 미 공화당의 강경 보수파 ‘티파티(Tea Party)’가 있다. 한 연구자가 티파티 관계자에게 왜 음모론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실은 음모론을 믿지 않지만 믿는다고 얘기함으로써 우리를 관통하는 공통의 태도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라는 취지로 답했다. 즉, 음모론을 믿지 않더라도 자신이 속한 신념의 공동체 또는 이익의 공동체가 믿는다고 하니 나도 힘을 합쳐야 한다는 태도일 수 있다.”

―윤 대통령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라는 뜻인가.

“지금 우리 정치는 정권을 잃으면 모든 걸 다 잃고 감옥에 간다는 식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내가 지지하는 대통령이 철퇴를 맞으면 자신이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상징이 사라진다는 생각에 상실감이 클 수 있다. 이런 사회는 선거를 통해 정권과 국회의원을 교체하는 민주주의의 윤활유,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재집권이 윤 대통령 지지자들을 더 과격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는 듯하다.

“2020년 대선 결과를 부정한 음모론, 민주주의를 부정한 1·6 의회 난입 사태에도 결국 트럼프가 권력을 되찾았으니 ‘그런 성공의 경험을 우리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커졌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 민주주의가 큰 위기를 맞았다는 말로 들린다.

“음모론은 책임 전가와 회피의 장치다. 음모론 정치는 우리 사회에 ‘책임의 위기’와 ‘민주주의 파괴’라는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게 당연시되면 책임을 지지 않고 과실만 따먹으려는 정치 세력이 득세한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이 무너지는 것이다.”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윤 대통령의 계엄은 정부와 군, 정치 등에 대한 공적 신뢰를 완전히 망가뜨렸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다른 누구의 얘기도 믿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공적 제도에 대한 신뢰가 붕괴하면 사람들은 더욱더 음모론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다. 치유가 힘든 깊은 병증에 빠졌다. 이 ‘윤석열의 유산’을 두고 우리 사회는 꽤 오랫동안 싸워야 할 것이다. 썩은 사과만 골라내자는 접근법은 음모론자들을 단순히 미친 사람으로만 보는 것이다. 하지만 썩은 사과 박스 자체가 문제다. ‘안티 팬덤’의 우리 정치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음모론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정부, 정치, 사법, 언론 등 공적 제도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63)
서강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교육 불평등 문제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사회학회 총무이사, 한국문화사회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음모론의 시대’ ‘세대 게임-세대 프레임을 넘어서’ 등의 저서를 펴냈다. 음모론, 세대 및 교육 문제 등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음모론의 시대#전상진#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