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탈북 기자가 본 북한인권보고서 유감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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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서울 종로구의 한 빌딩에서 열린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 개소식.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북한 인권 조사를 정부가 독점했지만 북한인권보고서가 나오기까지 다시 7년이 더 흘러야 했다. 동아일보DB
2016년 9월 서울 종로구의 한 빌딩에서 열린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 개소식.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북한 인권 조사를 정부가 독점했지만 북한인권보고서가 나오기까지 다시 7년이 더 흘러야 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통일부가 작성한 ‘2023 북한인권보고서’가 지난달 31일 공개됐다. 이번 보고서는 지난 정부가 숨겨왔던 북한 인권 문제를 다시 정부 차원에서 공론화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솔직히 이것만 빼고는 칭찬할 게 별로 없다.

통일부에 북한인권기록센터가 생긴 지 벌써 7년째다. 기존에 북한 인권 실태를 조사하던 민간단체들의 하나원 접근 권한까지 박탈하면서 그동안 독점적으로 조사한 것이 고작 이게 다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아무런 통계도, 실명도 없는 단순 나열식의 보고서를 읽어보면서 수십 명의 공무원과 최소 수십억 원 이상의 예산을 쓰며 존재한 북한인권기록센터가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지 의문만 든다.

다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원에서 설문조사할 권한만 부여받는다면 나 혼자서도 매년 이것보단 몇 배로 더 잘 쓸 수 있다”였다.

통일부가 북한 인권 문제를 직접 조사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기 전 이미 국내에선 여러 버전의 북한인권백서가 발간되고 있었다. 통일교육원,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대한변호사협회 등이 백서를 매년 발간했다. 북한 인권 상황을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들에겐 통일부의 북한인권백서는 추천하지 않는다. 이번 보고서는 통일교육원 버전을 그대로 베낀 것이란 의심도 든다.

정부는 “그래도 숨겨 오던 기록을 공개한 것이 어디냐”고 변명을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만들려면 앞으로 정부는 손을 떼고 민간단체에 맡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통일부의 북한인권보고서는 내용의 부실함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걸 왜 만드는지에 대한 목적 의식이 엿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북한인권보고서 발행의 목표는 북한 주민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데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북한의 참혹한 인권 상황을 널리 알리는 것과 동시에 인권 범죄의 가해자들을 위축시켜야 한다. 그런데 통계가 전혀 없고, 증언의 구체성과 정황이 사라진 이런 보고서는 국제사회에 내놓기에도 창피한 수준이다.

단순하게 누가 죽었다더라가 아니라 “누가 무엇 때문에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하게 적시해야 한다. 물론 증언자의 신상 노출 우려 때문에 모든 것을 공개할 순 없겠지만 가능한 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름을 적시하는 노력은 해야 한다. 그래야 보고서가 힘을 갖게 된다.

비유한다면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납북자 김성학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몽둥이 구타와 물고문은 물론이고 전기고문을 가해 척추 디스크가 녹아내렸다”고 써야 증언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고서는 “납북자를 간첩으로 만들려고 전기 고문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는 식으로 적는 데 그쳤다.

북한에는 수많은 이근안이 존재한다. 중국과 북한에서 참혹한 인권 유린 감옥을 6개나 경험하며 고문을 받았던 필자가 그 산증인이다. 난 지금도 감옥에서 심심하다는 이유로 수시로 구금자들을 불러내 구타와 성희롱을 일삼던 자들, 새로 끌려온 여성을 끌고 나가 잔혹하게 짓밟고 성폭행을 일삼던 자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20, 30대 중반이던 그자들은 어쩌면 지금도 현직에서 저승사자로 군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엇이 두려워 희생자와 가해자의 실명을 숨겨줘야 하는가. 북한은 소문이 빠른 사회다.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가해자들에게 누군가 “당신의 악행이 남조선 보고서에 올라 있고, 당신에게 당한 사람들이 자손대대로 꼭 복수하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전해준다면 그들은 어떤 충격을 받을 것인가. 우리가 북한의 참혹한 인권 현장을 손바닥처럼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좌시하지 않고 꼭 책임을 묻기 위해 낱낱이 기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북한 인권을 기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중에 김정은 체제가 붕괴된 뒤 북한인권보고서는 과거사 청산을 위한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구체성이 결여되고 시늉 내기에 그친 지금의 통일부 보고서에 기초한다면 그때 가서 재조사가 불가피할 것이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라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공개된 통일부의 북한인권보고서는 북한의 참혹한 인권 실상에 분노할 줄 모르고 공감하지 못하는 복지부동, 무사안일주의의 공무원들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북한 인권 기록 작업을 지금처럼 계속 맡겨야 하는지 의문만 들게 할 뿐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인권보고서#부실함#목적 의식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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