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9층 벽에 걸린 첫 여성 사진… 세계 경제계의 ‘우먼파워’[글로벌 현장을 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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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의 국제통화기금(IMF) 본부 9층에 있는 리서치센터 입구 벽에 걸린 역대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사진들. 기타 
고피나트 현 수석 부총재(아랫줄 오른쪽)가 유일한 여성이다. 워싱턴=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미국 워싱턴의 국제통화기금(IMF) 본부 9층에 있는 리서치센터 입구 벽에 걸린 역대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사진들. 기타 고피나트 현 수석 부총재(아랫줄 오른쪽)가 유일한 여성이다. 워싱턴=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김현수 뉴욕 특파원
김현수 뉴욕 특파원
9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에 위치한 국제통화기금(IMF) 제1본부. 이곳 9층에는 IMF의 세계 경제 관련 연구가 수행되는 리서치센터가 있다. 세계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경제전망(WEO)’을 발표하는 곳이다.

센터 입구 쪽으로 가니 한쪽 벽에 역대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액자 11개 중 여성 사진은 딱 하나. 현 ‘IMF 2인자’인 인도계 기타 고피나트 수석 부총재(52)였다.》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출신인 고피나트 부총재는 2019년 IMF 최초 여성 수석 이코노미스트, 2022년 수석 부총재에 올라 최근 세계적 돌풍이 불고 있는 여성 고위 경제관료 ‘이너서클’의 주요 인물로 꼽힌다.

고피나트 부총재는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여성이) 장벽을 깨고 싶다면 ‘후츠파(Chutzpah) 정신’을 가져야 한다. 나도 이 정신으로 자신감을 갖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털어놨다. 후츠파는 히브리어로 담대함, 뻔뻔함이란 뜻이다. 이스라엘 특유의 도전 정신, 과감한 개척 정신, 집요함 등을 가리킨다.

세계 경제계 우먼파워
경제 분야는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분야로 꼽힌다. 하지만 최근 미국, 인도, 스페인 등 세계 주요국에서 최초의 여성 재무장관이 탄생하는 등 여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지난달 인도 벵갈루루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에 참석한 여성 관료들. 왼쪽부터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기타 고피나트 IMF 수석 부총재. 사진 출처 고피나트 부총재 트위터
지난달 인도 벵갈루루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에 참석한 여성 관료들. 왼쪽부터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기타 고피나트 IMF 수석 부총재. 사진 출처 고피나트 부총재 트위터
지난달 인도 벵갈루루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에서도 여성 관료들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주최국 인도의 니르말라 시타라만 재무장관을 비롯해 재닛 옐런(미국), 나디아 칼비뇨(스페인), 스리 물랴니 인드라와티(인도네시아) 등 많은 재무장관이 여성이었다.

최초의 여성 IMF 총재를 지낸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 고피나트 수석 부총재도 자리했다. 이들은 같이 사진을 찍고 교류를 강화하며 ‘글로벌 여성 리더십의 이너서클’을 형성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 내 경제팀에도 여풍이 상당하다. 옐런 장관은 물론이고 최근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에 선임된 레이얼 브레이너드가 바이든 행정부의 주요 경제 정책을 이끌고 있다. 그는 미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부의장을 거쳐 백악관으로 진출했다. 집권 민주당과 야당 공화당의 대립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미 연방정부의 부채한도 협상을 관장하는 주요 상하원 의원, 백악관 예산관리국장 등도 모두 여성이다.

최근 스위스 1, 2위 은행인 UBS와 크레디트스위스의 역사적 인수합병(M&A)을 이끈 주역인 카린 켈러주터 스위스 재무장관, 마를레네 암스타트 금융감독(FINMA) 의장도 여성이다.

이들 상당수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경제학계에서 꾸준히 학자로서 영역을 개척하며 고위 관료로 발돋움했다. 각국 중앙은행, 국제기구에서 경험을 쌓으며 최고위직에 오른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 미국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명문 컬럼비아대의 첫 여성 총장으로 선임된 이집트 출신의 네마트 샤피크 영국 런던정경대(LSE) 총장은 과거 미 워싱턴의 국제기구 세계은행(WB)의 최연소 부총재도 맡는 등 일찌감치 여러 유리천장을 깼다.

고피나트 부총재는 여성 고위직 증가가 곳곳의 장벽을 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고위직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큰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 또한 IMF의 첫 여성 총재였던 라가르드 ECB 총재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며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그들의 능력이 내가 첫 IMF 여성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되는 데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불굴의 워킹맘 “배우자 역할 중요”
이들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이 적지 않았다며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의 지원으로 육아 부담을 던 것이 성공의 주요인이라고 강조했다.

첫 여성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 연준 의장, 재무장관 등 갖가지 기록을 세운 옐런 장관은 지난해 방한 당시 한국은행 직원 간담회에서 ‘커리어를 이어간 원동력’을 묻는 질문에 “평등한 가사 분담”이라고 답했다.

옐런 장관은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일 때(1994년) 연준 이사직을 제안받았다. 당시 남편은 ‘하겠다고 말해. 걱정 마.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라고 해 줬다”고 회고했다. 그의 남편은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 애컬로프 조지타운대 교수. 부부는 옐런 장관이 연준 신입 직원이던 시절 구내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브레이너드 위원장 또한 2021년 연준 부의장 취임 당시 “워킹맘으로서 세 딸, 남편, 여동생들, 엄마에게 특별한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고 밝혔다. 그는 남편인 커트 캠벨 미 백악관 인도태평양조정관을 미 하버드대 구내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고피나트 부총재 또한 “운 좋게 남편이 나의 커리어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 지금 20세가 다 된 아들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되고 있다”며 “결혼할 때 (자신의 선택을) 지지해 줄 좋은 파트너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완전한 균형은 멀어
사회적 지원 또한 필요하다. 고피나트 부총재는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성차별 수준이 높다는 점을 지적하며 “여성이 출산했다고 커리어에 손해를 입지 않도록 사회가 나서야 한다. 한국의 심각한 저출산 해소를 위해서라도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남녀 임금 격차는 1위이고,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성 경제 고위직이 늘어도 절대 수치 자체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독일 괴테대가 세계 238개 대학을 조사한 결과, 경제학 박사과정에 있는 여성 비중은 40%에 달했지만 교수직으로 갈수록 수치가 줄었다. 유럽은 27%, 미국은 20%에 그쳤다. 니콜라 푸크스쉰델른 괴테대 교수는 로이터통신에 “다양성이 더욱 커질수록 사회과학자로서 더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며 “더 많은 여성이 경제학을 전공으로 택하도록 해야 하고, 이 분야에 남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 경제 분야의 여성 고위직 비중은 학계보다 더 낮다. 미 CNBC에 따르면 월가 투자은행의 여성 고위직 비중은 17% 미만이다.

지난해 말 미국에서는 달러화 지폐에 최초의 여성 재무장관 및 여성 재무관의 서명이 인쇄되는 행사가 열렸다. 당시 옐런 장관은 “재무부와 경제 분야의 여성들에게 더 큰 기회를 제공하는 데 진전을 이뤘지만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다”고 촉구했다. 라가르드 총재 또한 최근 행사에서 “여성이 경제 분야의 ‘곁가지’로 남겨지면 엄청난 기회가 낭비된다”고 했다.


김현수 뉴욕 특파원 kimhs@donga.com
#세계 경제계#우먼파워#불굴의 워킹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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