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경영참여’ 관치 논란… “기금운용 독립성 강화를”[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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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드십 코드 강화 어떻게… 과거 ‘주총 거수기 꼬리표’ 떼고
적극적 주주권 강화 나섰지만, 정부 눈치보기-인사개입 논란
‘연금 관치’ 비판서 못 벗어나… 복지부장관이 기금위원장 맡아
독립적 의사결정 내리기 어려워 “공사화-외부에 운용 맡겨야”


신아형 경제부 기자
신아형 경제부 기자
“소유가 분산돼 지배구조에 도덕적 해이가 일어날 수 있는 경우 절차와 과정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해줄 스튜어드십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업무보고에서 이른바 ‘주인 없는 회사’에 대한 스튜어드십을 언급하자 국민연금이 주목받고 있다. 국민연금은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된 KT, 포스코 등 명확한 대주주가 없는 회사들의 임원 선임 과정에서 스튜어드십코드 준수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과거부터 내왔다.

영어로 ‘집사’라는 뜻의 ‘스튜어드십(stewardship)’은 큰 저택에서 주인 대신 집안일을 도맡는 집사처럼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가 고객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업경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행동 지침이다. 기업경영 감시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과도한 스튜어드십 행사가 민간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이 때문에 시장에선 국민연금을 둘러싼 ‘관치’, ‘연금 사회주의’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자본시장 큰손’ 국민연금
국민연금에 따라붙던 꼬리표는 과거엔 ‘주총 거수기’였다. 우량기업의 1, 2대 주주 자리를 꿰차고 있으면서 주주총회에서는 존재감 없이 찬성표만 던진다는 이유에서다. 이 같은 오명을 벗기 위해 국민연금은 2018년 ‘국민연금기금 수탁자 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을 제정해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고 본격적인 주주권 행사 강화에 나섰다.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전인 2017년 12.9%에 그쳤던 반대 의결권 행사 비율은 도입 이후 2018년 18.8%, 2019년 19.1%로 높아졌다.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기업 활동을 감시하고, 지배구조 개선에 기여하겠다는 취지 자체는 그럴듯해 보인다. 문제는 현실에서 그 감시가 제대로 ‘독립적’으로 이뤄지느냐다.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이후 ‘주총 거수기’라는 오명은 탈피했지만 국민연금은 ‘연금 관치’라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경영진 교체 시도와 정부 눈치보기식 의결권 행사가 이어진 결과다.


국민연금의 운용 규모는 지난해 11월 말 기준 920조 원에 달한다. 기업들에 미치는 입김이 막강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도 KT의 차기 대표이사 선임을 두고 국민연금을 통한 윤 정부의 인사 개입 우려가 일었다. KT 이사회는 지난해 12월 구현모 대표를 차기 대표이사로 단독 추천했지만 국민연금은 선임 과정의 불투명성을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다. 이어 윤 대통령까지 스튜어드십을 강조하자 KT는 결국 공개모집을 통해 후보자군을 새로 구성하겠다고 9일 발표했다.

KT는 지난해 연 매출이 1998년 상장 이후 처음 25조 원을 넘어서는 등 2020년 구 대표 취임 이후 괄목할 만한 경영 실적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절차적 문제를 내세워 인사에 제동을 건 국민연금의 ‘본의’가 투명성 강화보다는 전 정권 시절 임명된 구 대표의 연임 저지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경영 리스크가 부각되며 KT의 주가는 지난해 12월 3만8000원대에 달했으나 최근 3만3000원대까지 내려앉았다.



KT뿐만 아니라 윤 정부 출범 이후 국민연금이 대주주로 있는 신한금융과 우리금융 등 주요 금융지주 회장들도 모두 연임 없이 새 수장으로 교체됐다. 문재인 정부 때 선임된 최정우 포스코 회장, 내년 임기가 마무리되는 백복인 KT&G 사장 등이 국민연금의 다음 ‘물갈이 인사’ 타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포스코는 최 회장 이전 회장 8명 중 임기를 채우고 퇴임한 인물이 없을 정도로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수장이 교체되는 수난사를 겪었다.

●“기금위, 정부로부터 구조적 독립 이뤄야”

‘연금 관치’ 논란 속에 국민연금의 구조적 한계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현재 국민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당연직 위원은 기획재정부와 고용노동부 등 4개 정부 부처 차관들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맡고 있다. 국민연금은 2018년 9명의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주주권 행사 전담 자문기구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를 신설했지만 이 역시도 복지부가 각계 단체의 추천을 받아 위원회를 구성하는 기금위 산하 조직이다. 독립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틀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기금운용과 의결권 행사를 정부와 독립된 조직에 맡기고 국민연금은 본연의 업무인 전 국민의 노후자금을 지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금운용과 주주권 행사는 자본시장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정치적 이해관계에 휘둘려선 안 된다”며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처럼 기금운용본부를 공사화하거나 기금운용을 100% 외부 자산운용사에 위탁해 그들이 독립적인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은 재무적 투자자로서 노후자금 수익성을 보장하는 데 충실해야 한다”며 “이사 선임 등 소유분산기업에 대한 의사결정 시 정치 논리보다는 기업 실적 평가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국민연금은 13일 국내 위탁운용사 30여 곳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적극적인 의결권을 행사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연금은 이번 설명회가 “의결권 행사 투명성 및 공정성 제고를 위해 이뤄진 것”이라고 밝혔다.

“스웨덴, 연기금이 민간기업 좌우 못하게 6개로 쪼개”


에크발 스웨덴 국가연금펀드 CEO

“스웨덴이 연기금을 쪼갠 첫 번째 이유는 거대한 자본이 집중된 단일 펀드가 민간 기업을 좌우하는 것을 크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말 스톡홀름에서 만난 니클라스 에크발 국가연금펀드(AP)4 최고경영자(CEO·사진)는 “스웨덴의 공적연금 기금운용은 정부로부터 철저히 독립돼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에크발 CEO는 “공적연금제도는 훨씬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기 때문에 임기가 짧은 현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며 “스웨덴에서는 의회가 제정한 국가연금기금법을 통해 AP의 독립성이 보장된다”고 강조했다.

스웨덴의 공적연금제도는 연기금이 민간 기업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설계돼 있다. 스웨덴이 2001년 연금개혁을 통해 AP를 기본연금으로 운용하는 AP1∼4와 AP6, 프리미엄연금을 운용하는 AP7 등 독립된 6개 기금으로 분할했기 때문이다. 스웨덴 AP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는 각 9명으로 구성되는데 정부가 자산운용 전문가 5명을 임명한다. 근로자 대표 단체와 사용자 대표 단체도 각 2인씩 4명을 지명한다.

지난해 말 기준 스웨덴 AP 총 운용자산은 약 2400억 달러(약 303조 원)로 AP4는 이 가운데 약 450억 달러를 운용하고 있다. 기금운용 조직 분할로 독립성과 효율성을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게 에크발 CEO의 설명이다. 그는 “조직이 분산되면서 과도한 경영권 침해 등 자본 집중에 따른 부작용을 줄일 수 있었고, 의결권 행사에 대한 정치적 압력도 줄었다”며 “여러 개 펀드로 분산 투자하는 효과가 있어 환율 등 리스크 관리가 수월하고 투자 의사결정의 유연성도 커졌다”고 했다.

에크발 CEO는 “개인적으로 보기에는 단일 기금인 한국의 국민연금 규모가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고정수익을 추구하거나 지수를 추종하는 투자를 주로 한다면 기금 규모가 클수록 유리하겠지만 독립적이고 유연한 투자 전략을 추구한다면 한국도 기금운용 조직을 2개 이상으로 쪼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신아형 경제부 기자 abro@donga.com
스톡홀름=박민우 기자 min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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