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신광영]부실은 실탄이 되어 총구를 뚫고 나왔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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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에 만들어진 목조 교회 세트장. 2021년 10월 21일 이곳에서 알렉 볼드윈이 제작자이자 주연으로 참여한 서부영화 ‘러스트(Rust)’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에 만들어진 목조 교회 세트장. 2021년 10월 21일 이곳에서 알렉 볼드윈이 제작자이자 주연으로 참여한 서부영화 ‘러스트(Rust)’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신광영 국제부 차장
사건이 난 서부영화 세트장은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지대에 지은 19세기 양식의 작은 목조 교회였다. 그 안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을 때 밖에 있던 스태프들은 각본대로 촬영이 시작된 줄 알았다. 몇 초 뒤 시나리오 작가가 교회에서 뛰쳐나왔다. “911 불러, 911!”

세트장 안에는 주연 배우 앨릭 볼드윈(64)이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그가 방금 전 리허설했던 장면은 대본에 이렇게 나와 있었다. ‘무법자(볼드윈)는 포위해 오는 보안관과 맞서기 위해 교회 의자에 앉아 총을 쏘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농장주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10대 손자가 교수형을 면하도록 분투하는 백발의 무법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리허설이 시작되자 볼드윈은 어깨의 권총 지갑에서 45구경 구형 리볼버를 꺼냈다. 총은 가슴을 지나 카메라 렌즈 쪽으로 향했고, 곧 총성이 울렸다.

세트장에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총알은 촬영감독 할리나 허친스(42)의 몸을 관통해 뒤에 있던 조엘 수자 감독(48)의 어깨에 박혔다. 극 중에서 살인을 저지른 손자를 지키려 했던 볼드윈은 현실에서 제작진에 실탄을 쏜 배우가 되어 있었다. 10세 아들을 둔 엄마인 허친스는 숨졌고, 수자 감독은 중상을 입었다.

2021년 10월 21일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 지대에 설치된 서부영화 세트장에서 배우 앨릭 볼드윈이 촬영 도중 총기 사고를 낸 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AP 뉴시스
2021년 10월 21일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 지대에 설치된 서부영화 세트장에서 배우 앨릭 볼드윈이 촬영 도중 총기 사고를 낸 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AP 뉴시스


사건 1년 3개월 만인 지난달 31일 볼드원은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강력한 총기 규제를 주장해 와 전미총기협회(NRA)에서 눈엣가시로 여기던 인물이었다.

볼드윈이 세트장에서 집어든 권총은 소품담당자, 무기관리자, 조감독의 손을 거쳤다. 무기관리자는 소품담당자가 가져온 탄환이 공포탄이 맞는지 확인해 총에 장전하고, 조감독은 쏴도 안전한지 다시 점검해 배우에게 건네는 역할을 한다. 당시 조감독은 볼드윈에게 총을 주면서 “콜드건(공포탄이 든 총)”이라고 말했지만 방아쇠 앞에 실탄이 꽂힌 상태였다.

사건 당시 볼드윈에게 건네진 45구경 구형 리볼버 권총. 탄창 대신 실린더에 총탄을 넣는 여러 개의 약실이 있다.  Santa Fe County Sheriff’s Office
사건 당시 볼드윈에게 건네진 45구경 구형 리볼버 권총. 탄창 대신 실린더에 총탄을 넣는 여러 개의 약실이 있다. Santa Fe County Sheriff’s Office
무기 관리를 맡았던 24세 여성은 이번 영화가 자신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소품총 공급업자의 딸이었다. 이 초보 무기관리자는 첫 작품 때도 촬영장에서 예고 없이 총을 발사해 스태프들을 놀라게 했다. 주연 배우였던 니컬러스 케이지가 “당신 때문에 고막이 터질 뻔했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한 스태프는 “그가 장전된 권총을 겨드랑이에 꽂고 촬영장을 누볐는데 총구가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고 했다.

조감독 역시 다른 영화 촬영장에서 총기 사고를 내 해고된 적이 있었다. 25년 경력자인 그는 제작사의 요구에 맞춰 일정을 관리하는 데 능했지만 안전 수칙이나 절차를 건너뛰곤 했다는 게 동료들의 전언이다.

촬영 중 실탄이 발사돼 제작진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목조 교회 세트장에 경찰관들이 진입해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 AP 뉴시스
촬영 중 실탄이 발사돼 제작진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목조 교회 세트장에 경찰관들이 진입해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 AP 뉴시스
이 사건으로 볼드윈까지 재판에 넘겨지자 미국 영화계가 크게 술렁이고 있다. 영화·TV 종사자 노조는 성명을 내 “허친스의 죽음은 예방할 수 있었던 비극이지만 배우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다. 배우는 무기 전문가가 아니다”라고 했다. 한 유명 액션배우도 가세했다. “우리는 제이슨 본이 아닙니다. 배우는 캐릭터에 몰입하는 예술가일 뿐 촬영장 안전요원이 아닙니다.”

하지만 검찰은 볼드윈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봤다. 배우는 총기의 최종 사용자로서 안전 확인 의무가 있고, 사람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는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검찰 공소장에는 볼드윈이 촬영 전 총기 안전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후 안전 교육 때도 가족과 통화하는 등 집중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건 5일 전 촬영장에서 2차례 총기 사고가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소품담당자가 발밑에 총을 겨누다가 총이 발사됐고, 몇 시간 뒤 스턴트맨이 또다시 실수로 소총을 쐈다고 한다. 영화 제작자이기도 했던 볼드윈은 참사를 예고하는 이런 신호를 흘려보냈다.

2019년 12월 영화 ‘아키네미(Archenemy)’를 촬영 중인 할리나 허친스 촬영감독. 허친스는 2021년 10월 영화 ‘러스트’ 촬영장에서 총에 맞아 10살 아들과 남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우크라이나계인 그녀는 키이우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뒤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건너와 영화를 공부했다. AP 뉴시스
2019년 12월 영화 ‘아키네미(Archenemy)’를 촬영 중인 할리나 허친스 촬영감독. 허친스는 2021년 10월 영화 ‘러스트’ 촬영장에서 총에 맞아 10살 아들과 남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우크라이나계인 그녀는 키이우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뒤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건너와 영화를 공부했다. AP 뉴시스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을 희생시켜 온 제작 관행을 고발하는 목소리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오고 있다. 신출내기를 싼값에 무기관리자로 고용해 다른 일까지 맡기는 일이 적지 않다. 게다가 명문화된 총기 관리 규정도 없어 촬영장에서 어깨너머로 배울 뿐이다. 스태프들은 안전사고가 나도 제작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향후 고용이 안 될까 봐 나서기를 꺼린다. 할리우드 촬영장은 안전에 있어 ‘무정부 상태’에 가깝다는 말까지 나온다.

2021년 10월 미국 서부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일상 속 위험을 과소평가하며 안전을 뒤로 미루다 보면 그 어떤 서부영화보다 참혹한 실화가 펼쳐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볼드윈이 든 총에 어쩌다 실탄이 장전됐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쩌면 차곡차곡 누적돼 온 부실 그 자체가 실탄이었다.

볼드윈이 촬영 도중 자신이 쏜 총에 촬영감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세트장 한 구석에서 허리를 굽힌 채 괴로워하고 있다. AP 뉴시스
볼드윈이 촬영 도중 자신이 쏜 총에 촬영감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세트장 한 구석에서 허리를 굽힌 채 괴로워하고 있다. AP 뉴시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할리우드#촬영장#총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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