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장관은 책임지는 자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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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장관이 책임지지 않으니 문지기가 책임지는 사태 벌어져
법으로는 일선의 책임은 무한하고 고위층 책임 묻기 힘든 한계 있어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어느 프랑스 정치가는 각료직을 제안받았을 때 차관이 책임지는 조건이라야만 맡겠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왕이 아니라 장관이 책임진다. 장관이 책임지지 않는다면 끝내는 돌고 돌아 문지기가 책임지는 사태에 이른다. 이런 책임전가는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맞는 재료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한 말이다. 키르케고르는 1813년에 태어나 1855년에 죽었다. 그의 생몰(生沒)연도로 보아 여기서의 왕은 제1제정(1804∼1824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 제2제정기(1852∼1870년)의 나폴레옹 3세가 아니라 1830∼1848년, 이른바 7월 왕정기의 루이 필리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프랑스인의 왕’으로 불렸다. 전체 인구의 0.8%만이 선거권을 가진 상황이긴 했지만 그는 신에 의해, 다시 말해 성직자의 축성(祝聖)에 의해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에 의해 선출된 왕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당시는 입헌군주제였다. 왕이 있었지만 정부는 유권자에게 책임을 져야 했다. 그 책임을 장관이 졌다.

여기서의 책임의 의미는 내각책임제의 책임과 같다. 법적인 잘못을 저질러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혹은 정책적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각책임제는 영어로 the parliamentary cabinet system이라고 한다. 의원내각제가 더 정확한 번역어이지만 우리는 내각책임제라는 말을 오히려 더 많이 쓴다. 내각책임제라는 말은 정치적 혹은 정책적 실패의 책임을 누가 어떻게 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긴 번역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제(the presidential system)도 대통령책임제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내각과 달리 임기가 보장돼 있다. 내각은 다수당과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물러나야 하지만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 대통령은 책임질 방법이 없다. 그래서 책임지는 것이 장관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어느 프랑스 정치가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차관이 책임지는 조건으로 장관을 맡겠다는 말은 장관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장관이 차관이나 그 밑의 공무원들과 다른 것은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제에서 장관이 책임져야 하는데도 책임지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묻는 제도가 의회의 해임 건의권이다.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없다. 그래서 건의일 뿐이다. 다만 국민이 공분하는 일이 발생했는데도 담당 장관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결국 돌고 돌아 끝내는 문지기가 책임지는 사태에 이른다. 이태원 참사의 경우에도 장관도 책임지지 않고 차관도 책임지지 않고 경찰청장도 책임지지 않고 서울경찰청장도 책임지지 않으니 결국 일종의 문지기인 일선의 경찰서장과 소방서장이 책임지는 사태에 이르렀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고대 그리스의 희극(comedy) 작가다. 고대 그리스는 흔히 비극(tragedy)의 시대라고 보기 때문에 이 희극 작가는 특별하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란 작품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조롱했다. 우리는 플라톤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달랐다고 옳게 평가하고 있지만 당대의 그에게는 소크라테스 역시 말장난으로 먹고사는 소피스트 중 하나였을 뿐이다.

말장난, 좋게 말하면 수사법을 가르치는 대가로 먹고사는 게 소피스트들이었다. 여기서의 수사법은 주로 법정에서의 다툼에서 이기기 위한 기술이었다. 소피스트들에게 진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상대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조롱한 소피스트들은 오늘날로 치면 법률가들이다. 법률가들은 본능적으로 책임을 전가한다. 처음에는 예방 불능론을 들먹이더니 돌연 일선 책임론을 들고나왔다. 경찰이 대통령실로 향한 시위대를 막는 데 힘을 쓰다가 이태원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닐까, 경찰국이 신설돼 경찰이 민생보다 권력의 눈 밖에 나지 않는 데에 더 신경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은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이 정권의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법은 일선의 책임은 무한하고 고위층으로 갈수록 책임을 묻기 어렵게 돼 있다. 이런 책임 전가야말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 딱 맞는 재료가 아닐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이태원 참사#장관#책임지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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