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용석]분노와 공포만 좇는 정치의 폐해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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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회로 잠그는 치트 키
합리적 공론 망친다

김용석 산업1부장
김용석 산업1부장
“넷플릭스 등 빅테크의 망 무임승차가 국내 통신사 투자 여력 떨어뜨리는 악영향을 미친다.”(7월 12일, 더불어민주당 빅테크 갑질대책 태스크포스)

“통신사 보호하려 애국 마케팅 하다가 국내 콘텐츠 사업자 폭망 불러올 위험천만한 일이다.”(9월 30일, 정청래 민주당 의원)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 해외 빅테크 기업들이 국내 인터넷 망을 이용할 때 사용료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법안에 대해 민주당의 목소리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인터넷으로 게임 영상을 방송하는 미국 기업 트위치는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한국에 제공하는 영상만 화질을 낮추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배경은 망 사용료 법안 때문임을 암시했다. 게임 영상을 즐겨 보는 인터넷 이용자들이 통신사와 국회에 분노를 쏟아냈다. 망 사용료 의무화를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트위치 발표 사흘 만에 “법안에 문제점이 있어 보인다”고 입장을 바꿨다. 인터넷 이용자들의 분노에 반응한 것이다.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2008년 5월 광우병 사태가 본격화하기 직전 ‘인터넷 종량제 괴담’이 돌았었다. “인터넷 종량제가 곧 추진돼 요금이 폭등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광우병 사태와 인터넷 종량제 괴담은 과학적 사실이나 실체적 진실이 아닌 불신과 공포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닮은꼴이었다.

인터넷은 수도, 전기에 버금가는 생존 조건이 됐다. 종량제로 사용에 위협을 받는다는 상상은 공포와 분노를 자극했다. 이성회로를 잠그는 하나의 ‘치트 키(cheat key·게임에서 언제나 통하는 만능열쇠라는 뜻으로 쓰임)’였던 셈이다. 특히 인터넷에 둥지를 튼 여론 참여자들에게 더욱 폭발력이 컸다. 그 이후로도 인터넷 커뮤니티에 기반을 둔 게임 이용자 등은 기민한 여론 집단으로 성장했다. 불만이 생기면 광속으로 조직화해 돈을 모으고, 전광판 트럭을 동원해 시위를 벌이는 실행력과 영향력을 갖게 됐다.

문제는 이렇게 표출되는 분노와 공포에만 주목하는 정치 행태다. 당론을 뒤집는 과정에서 민주당이 포착한 것은 바로 ‘빅테크에 대한 분노’와 비교해 ‘통신사에 대한 분노’가 더 커지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합리적 토론이 아니라 분노와 공포를 좇는 것은 선동가의 방식이다.

민주당 스스로 ‘빅테크 갑질 방지’ 법안을 만들며 고심했겠지만 인터넷 데이터 폭증으로 설비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그 비용을 내야 한다. 누가 얼마나 부담할 것인지 균형점은 시장 참여자 간 치열한 협상, 그리고 공공선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공론으로 정해져야 한다. 어느 한 편을 적이나 악마로 모는 순간 합리적 토론은 물 건너간다.

북핵 위협 안보 논쟁에서도 이 대표의 ‘한반도 욱일기’ 발언은 모든 토론을 ‘친일 대 친북’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욱일기 논쟁’은 국가 안보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분노와 공포를 위한 것인가.

다시 인터넷 이용자 얘기로 돌아간다. 인터넷 게임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특혜를 주되 공정을 잃지 않는 데 있다. 돈을 내고 아이템을 사면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지만, 지나치게 유리해지는 순간 그 게임은 문을 닫는다. 다수 이용자들이 ‘말도 안 되는’ 게임 판을 떠나기 때문이다. 치트 키가 배척받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공론장 위에서도 치트 키 등장이 반복된다면 결국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멀리 떠나게 될 것이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



#이성회로#합리적 공론#정치 폐해#빅테크 갑질 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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