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덕]글로벌 공급망 위기의 기습, 진정한 시험대 오른 기업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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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덕 산업1부 차장
김창덕 산업1부 차장
국내 대기업 연구개발(R&D)부서에서 센서를 개발하고 있는 A 씨는 최근 업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업무량이 많아서? 오히려 반대다. 필수 부품이 없어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는 게 고민이다.

미국 B사에 제작주문을 맡겨오던 ‘포토 다이오드’는 보통 설계를 끝내고 발주를 넣으면 5주일이면 손에 쥐었다. B사는 최근 ‘제작’이 아닌 ‘제작 검토’만 넉 달이 걸린다고 회신했다. 제작을 못해준다는 검토 결과가 나오면 A 씨로선 넉 달을 허비하는 셈이다.

두 배로 오른 가격에 급행료까지 지불하겠다는데도 대답은 같았다. A 씨는 회사 내 시장분석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속 시원한 설명을 해주는 이가 없다. 전 세계 공장들을 세운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실험실까지 파고든 것이다.

공급망관리(SCM)는 사실 삼성 등 국내 대표 기업들이 2000년대 초중반 급성장할 수 있었던 숨은 무기였다. 수요를 예측해 꼭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적기 공급 생산 방식’(Just In Time)은 부품 및 제품의 재고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여줬다. 주문에서 운송까지의 시간을 최소화해 고객 신뢰도 얻었다. 한국 TV, 스마트폰, 가전 등이 세계 1위에 오르는 데 SCM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지금의 SCM은 정밀 데이터분석과 인공지능(AI)까지 가세했다. 20년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도화됐다. 이 때문에 뛰어난 SCM 능력을 갖춘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서 오히려 반사이익을 누리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팬데믹과 전쟁이 몰고 온 공급망 리스크는 예상보다 범위가 넓고 치명적이었다. 자동차 주문이 밀려드는데 반도체 부족으로 차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글로벌 완성차업체들이 2020∼2021년 생산지연으로 입은 매출손실만 1100억 달러를 훌쩍 넘긴다는 보고도 있다. 글로벌 테크 기업들이 반도체를 ‘싹쓸이’한 영향도 있지만 결국 자동차회사들이 수요 반등을 예상하고 사전 물량을 확보해놓지 못한 결과였다. 한국 기업도 피해갈 도리가 없었다.

기업들은 앞으로 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지금의 공급망 위기를 불러온 수요 폭증이 언제든 식어버릴 수 있어서다. 공급망 위기에 놀라 ‘과도한 주문’을 넣거나 ‘과도한 설비 투자’에 나섰다가 인플레이션이 끝나고 경기 침체가 오면 몰락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공급망 관련 세계적 구루인 요시 셰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엔지니어링시스템학과 교수는 ‘채찍 효과’를 경고한다. 손잡이에 가해진 작은 힘이 채찍 끝의 거대한 움직임을 만드는 것처럼 수요의 변화가 공급망 가장자리에 위치한 기업들을 생존의 기로에 내몰 수도 있다는 얘기다. 윌리 시 미국 하버드경영대학원 경영학과 교수도 지난달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온라인판에 쓴 글에서 “공급망 관리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모든 예측은 틀린다’는 법칙마저 생긴 불확실성의 시대다. 한국 기업들의 진정한 시험대는 바로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


김창덕 산업1부 차장 drake007@donga.com


#글로벌 공급망#대기업#공급망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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