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밧줄과 닻[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62〉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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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물 위에 떠 있는 길이 200m의 선박을 멈추는 것은 쉽지 않다. 큰 선박을 멈추려면 밧줄과 닻이 필요하다.

도선사의 안내로 선박은 천천히 부두로 향한다. 부두에 근접하면 선원이 메신저 라인을 빙빙 돌려서 육지로 던진다. 그 라인 끝에 밧줄이 달려 있다. 부두에서 기다리던 줄잡이가 쇠붙이 비트에 줄을 걸어준다. 이제 첫 줄이 육지와 연결됐다. 이 연결 시점은 선박의 항구 도착 시간이 된다. 서서히 줄을 감으면 배가 부두로 가까이 간다. 두 번째, 세 번째 밧줄이 앞쪽에서 나간다. 뒤편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 6개의 줄이 모두 잡히면 배는 제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다.

태풍의 영향으로 부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밧줄 6개가 배를 온전히 잡아주지 못한다. 바람에 크게 노출된 선박의 몸체에 부딪치는 저항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이럴 때에는 바다로 줄행랑을 치는 것이 상책이다. 넓은 바다에서 바람과 싸우는 것이 더 안전하다. 육지에 미련을 두고 바다로 나가는 것을 미루었다가는 밧줄이 끊어지고 배는 좌초하고 만다. 바람이 더 강하지 않을 때 미리 부두와 항구를 벗어나야 한다. 이런 대피 시간을 놓친 것이 시프린스 사고 원인의 하나가 됐다.

낡은 밧줄을 계속 사용하면 빳빳하게 감는 도중 밧줄이 터지기도 한다. 빳빳하게 성을 낸 밧줄이 터지면 지그재그를 그리면서 튄다. 여기에 사람이 맞으면 즉사한다. 그렇게 유용하고 고맙던 밧줄이 그만 흉기로 돌변한다. 아프리카 오지에 입항했다. 자고 일어나니 법정 비품인 예비용 밧줄이 사라졌다. 밧줄을 다시 구비해서 출항해야 한다. 누가 가져갔는지는 뻔히 안다. 아니나 다를까, 출항에 임박해 대리점이 와서 밧줄을 사라고 한다. 도난당한 우리 것을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샀다. 후진국에 가면 그런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닻은 아직 부두에 선박이 닿기 전에 활용된다. 부두가 나기를 기다리며 일시 대기해야 할 때 닻을 외항에 놓는다. 닻을 중심으로 선박은 빙글빙글 돌 뿐이지 장소적 이동을 하지는 않는다. 부두에 선박을 붙일 때도 닻이 요긴하게 사용된다. 앞에서 바람이나 조류가 강해 배가 뒤로 밀리는 경우 밧줄만으로 그 큰 배를 잡아둘 수 없다. 선박의 앞에 닻을 놓으면 힘이 배가돼 배가 뒤로 밀리지 않는다.

콜롬비아 강에서의 일이다. 부두에 붙은 배를 조금 이동시키는 중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강한 조류에 의해 배가 부두와 너무 벌어지면서 점점 통제 불능이 됐다. 200m 밧줄이 모두 나가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순간 오른쪽 닻을 내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차르르’ 소리를 내면서 닻이 강바닥으로 떨어졌다. 신기하게도 선박이 그 자리에 바로 서버렸다. 마지막 1m가 남은 밧줄을 서서히 감아서 부두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참으로 소중한 닻의 존재였다.

선박에 있는 기계나 기구는 선박의 운용에 어느 것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밧줄과 닻은 더없이 소중한 존재다. 나도 밧줄과 닻과 같이 주위에 소중한 존재일까 항상 자문하게 된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밧줄#닻#소중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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