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스승이다[2030세상/박찬용]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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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 칼럼니스트
박찬용 칼럼니스트
몇 년 전 나는 어떻게든 도망가고 싶었다. 내가 속했던 라이프스타일 잡지계의 업무는 고되었고 업황은 어두웠다. 나아질 방법을 찾는 대신 그저 눈을 돌리고 싶었다. 도망치듯 몇 번 이직하고 나니 더 이상 이직할 곳이 없었다. 동네 도서관으로 출퇴근했다. 프리랜서 원고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책 읽을 시간은 늘 있을 만큼 일이 별로 없었다.

그때 두 가지 큰 교훈을 얻었다. 하나, 무명 에디터에게 오는 일은 부실하다. 나는 어느 신용카드 팸플릿에 들어가는 소비정보 원고를 만들었다. 원고 기준은 부정확했고 책임소재는 나에게 불리했다. 일을 하며 그 구조를 이해했다. 업무 위계에서 나는 갑을병정의 정 자리였고, 일을 시키는 분은 해당 원고에 대한 기준이 없었다. 그때 내게 오는 일은 그런 것뿐, 내가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무명에 경력도 애매했으니까. 시장은 냉정했다.

도서관에서는 건축가 에세이를 읽었다. 읽다 보니 이들은 예술을 하는 프로젝트 매니저였다.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 회고록이 특히 대단했다. 어느 건축주가 화려한 개인 주택을 의뢰했다. 설계안만 몇 번씩 바꾸다 결국 프로젝트를 취소시켰다. 독자인 나는 게리가 어떻게 분노할지 궁금했는데 거장은 달랐다. 그는 이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이때 구상한 아이디어를 다른 곳에 활용했다고. 그때 깨달았다. 문제는 나였다. 일로부터 어떤 교훈도 끌어내지 못한 내가 모자랐다. 두 번째 교훈이었다. 일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그 후 나는 다행히 잡지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하던 일은 같았고 일을 대하는 자세가 변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걸 당연히 여겼고 작은 기회라도 감사히 여겼다. 그곳에서 나는 남들이 봤을 때 너무 몰아붙이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일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투덜거리며 날린 시간을 어떻게든 채워야 했다. 늦게 공부의 맛을 안 만학도 같은 마음으로 페이지를 만들었다. 그때 정말 많이 배웠다.

도서관에서 일하던 때가 몇 년 전이다. 정신 차린 후의 회사에서는 많은 걸 배우고 생각한 바 있어 다시 혼자 일하게 됐다. 자리는 변했지만 페이지를 기획하고 만드는 업무는 비슷하다. 다행히 이제는 갑을병정의 정 위치에서 휘둘리지는 않는다. 일이 쉬워진 건 아니다. 오히려 혼자 일하게 된 만큼 어려움과 불안감도 커졌다. 다만 이제는 일과 함께 따라오는 고통 자체가 교훈임을 안다. 업무상 모든 고통이 교훈이라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고통이 필요하다.

올해는 다행히 일이 많았다. 일하는 동안에는 ‘이런 일을 왜 받았지’ 싶을 만큼 고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일이 끝난 지금 ‘그 일을 받아 하지 말 걸 그랬다’ 싶은 일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일이 내게 뭔가를 가르쳐주었다. 어떤 일 안에서도 그게 뭐든 즐거운 구석이 있었다. 일이 잘되었을 때의 기쁨이야말로 대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런 ‘2030’도 있음을 적어두려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본다. 내년에도 여러 일을 통해 더 많은 걸 배우고 싶다. 이제 나는 도망가지 않는다.



박찬용 칼럼니스트


#일#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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