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광영]고성능 안전 설비로 우리는 더 안전해졌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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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차장
신광영 사회부 차장
지난달 서울 금천구에서 ‘불 없는 화재 사건’이 있었다.

불이 나지도 않았는데 지하 공사장에서 이산화탄소 소화설비가 작동돼 작업자 4명이 질식사했다. 불을 잡으려고 설치한 소화설비가 사람을 잡은 사건이었다.

이 소화설비는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와 달리 고농축 이산화탄소를 방출한다. 불난 곳의 산소 농도를 확 낮춰 불의 숨통을 끊는 방식이다. 불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선 사람도 순식간에 질식할 수 있다. 일반인에겐 낯선 소화설비지만 의외로 가까이 있다. 전시물에 물이 묻으면 안 되는 미술관, 박물관뿐 아니라 지하철역, 백화점, 병원 등에 설치돼있다.

경찰이 이번 사건의 경위를 수사하고 있는데 두 가지 사실이 이미 드러났다. 실수든 고의든 누군가 소화설비를 작동시키는 스위치를 눌렀고, 이산화탄소가 방출되기 전 경보가 울렸지만 상당수가 즉시 대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안전 설비는 여러 딜레마 속에서 타협을 거치며 만들어진다. 한 예로 아파트 옥상 문을 열어놓을지 말지도 간단치 않은 문제다. 잠가놓자니 화재 시 주민들이 대피할 수 없고, 열어놓자니 우범 지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온 게 화재가 감지될 때만 열리는 자동 개폐장치다.

이번 사건 현장에서 소화설비 작동 버튼은 누구나 누를 수 있도록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었다. 버튼을 꽁꽁 숨겨놓거나 누를 때 번거롭게 해놓으면 잘못 누를 가능성은 줄지만 정작 긴급 상황에서 설비를 작동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것 같다. 보완책으로 방출 버튼과 방출 지연 버튼을 나란히 설치했다. 혹여 잘못 눌렀다면 바로잡을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지만 빈틈이 많은 타협책이었다. 두 버튼은 색깔만 다를 뿐 크기가 같다. 훈련받은 전문가가 아니면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헷갈리기 쉽다. 이번 사건에서 버튼을 눌렀던 사람은 바로 옆 계단으로 대피하지 않고 오히려 내부로 들어갔다가 결국 숨졌다. 경찰은 그가 이산화탄소 방출을 멈추려다 버튼을 잘못 눌렀을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다. 무색무취인 이산화탄소에 색이나 냄새를 넣어 사람이 직관적으로 위험을 알아챌 수 있게 하지 않은 점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소화설비만 탓하기는 어렵다. 설비가 작동하기 전 대피 경보가 울렸을 때 즉시 대피하지 않은 작업자가 많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눈앞에 불이나 연기가 보이지 않아 대피를 주저했을 수 있다. 또 비상벨이 잘못 울리는 상황을 자주 경험하면 경보가 들려도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인간에겐 감각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다. 외부 자극을 전부 받아들이면 처리해야 할 부담이 너무 커지므로 선택적으로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나면 자연스레 안전에 둔감해질 수 있다.

안전 설비가 고도화된다고 해서 반드시 더 안전해지는 것은 아닌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안전벨트가 보편화되고 차로가 잘 닦여 있으면 운전자가 쉽게 속도를 높이듯, 사람마다 수용 가능한 위험의 총량이 있어서 안전한 환경에 있으면 그만큼 긴장을 늦추기 쉽다.

안전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맞서는 일이다. 가만히 두면 위험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므로 지속적인 교육으로 본능을 거스를 수 있게 해야 한다. 요즘처럼 고성능의 안전 설비가 많아질수록 우리가 어떤 설비의 영향권에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면 언제든 ‘안전의 역습’을 당할 수 있다.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불 없는 화재 사건#고성능 안전 설비#안전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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