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색다른 봄꽃[이준식의 한시 한 수]<132>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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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이 사람을 삭막하게 한다 마시라,

사계절은 저마다 한번씩 새로워지는 법.

갈바람도 사실은 봄바람 같은 손길 가졌으니,

감나무 잎 단풍 숲으로 색다른 봄을 가꾸지.

(休道秋山索莫人, 四時各自一番新. 西風사有東風手, 枾葉楓林別樣春.)


휴도추산삭막인, 사시각자일번신. 서풍진유동풍수, 시엽풍림별양춘.


―‘가을 산(추산·秋山)’ 양만리(楊萬里·1127∼1206)



소슬한 갈바람이 우수수 낙엽이라도 흩뿌리면 괜히 으스스하고 뒤숭숭해지는 게 사람 마음. 하지만 봄바람의 세례 속에 꽃들이 흐드러지듯 갈바람 또한 단풍을 짙붉게 물들이는 마력의 손길을 가졌으니, 그야말로 자연은 인간에게 계절마다 하나씩 색다른 선물을 안겨준다. 하여 시인은 가을 산이 마냥 사람을 스산하고 황량하게 할 것이라 예단하지 말라고 다독인다. 만물의 변화를 자연의 조화로운 섭리로 받아들이는 이 정도 여유라면, 단풍 숲에서 봄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도 어렵진 않을 테다. 세상사가 한결 호락호락하고 따습게 느껴질 듯도 싶다. 사실 춘풍과 추상(秋霜)은 각각 온화함와 냉정함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로 각인되지만, ‘사계절이 저마다의 새로움을 가졌다’는 시인의 눈으로 보면 봄바람과 가을 서리에도 서로 의기투합하는 공통점이 있다. 누가 뭐래도 단풍은 갈바람과 서리가 공모해서 가꾼 ‘색다른 봄’일 것이기에.

양만리는 4200여 수의 시를 남긴 남송의 대표적 다작 시인으로 특히 산수시에 뛰어났다. ‘대문 걸어 잠그고 시구 찾는 건 시작(詩作)이라 할 수 없고, 세상 돌아다녀 봐야 자연스레 시가 생긴다’는 지론을 견지한 결과였다. 후배 시인 강기(姜夔)가 ‘해마다 꽃과 달 한가할 날이 없고, 곳곳의 산과 물 당신께 들킬까 두려워하네’라 한 것은, 자연 경물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두루 시에 담은 선배에 대한 칭송이겠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가을#단풍#색다른 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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