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고양시에서 자영업을 하던 이문수(가명·39) 씨는 3월 사업 실패로 은행 대출이 막히자 급전을 마련하기 위해 온라인 상품권 거래 카페에서 한 업자와 계약을 맺었다. 업체가 이 씨의 계좌로 50만 원을 보내주면 9일 뒤에 이 씨가 백화점 모바일상품권 80만 원어치로 되갚는 조건이었다. 얼핏 정상적인 개인 간 상품권 거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연이율 2433%에 달하는 변종 불법 사채였다. 사채 조직은 ‘상품권 발송이 단 1분이라도 늦어지면 상환액의 100%를 위약금으로 더 내야 한다’는 조항까지 달았다. 정해진 날짜에 상품권을 보내지 못하자 업체는 이 씨를 사기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고, 취하 조건으로 추가 합의금을 요구했다. 이 씨는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에 빠진 것처럼 숨이 막혔다”고 했다.
● 단속 강화하자 상품권 카페로
최근 이처럼 상품권 예약 판매를 빙자해 고리를 요구하는 변종 불법 사채가 성행하고 있다. 정부가 대부 중개 플랫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연이율 60%가 넘는 불법 사채는 계약 자체를 무효로 하는 등 제재 수위를 높이자 불법 사채 조직이 단속망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상품권 거래로 무대를 옮겨가고 있는 것.
실제로 11일 한 상품권 카페에 가입해 자기소개 글을 올리자 1시간 만에 불법 사채 조직으로 의심되는 3명의 판매자로부터 쪽지가 도착했다. 이들은 “상품권을 거래하고 싶으면 연락 달라”며 텔레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아이디를 건넸다. 이 씨는 “불법 사채 조직 중에는 상품권 업자를 소개해 주며 빚을 메꾸라고 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상품권 거래를 가장한 불법 사채에 나서는 조직의 특징은 경찰을 ‘추심 대행업자’처럼 활용한다는 점이다. 직접 전화를 걸어 폭언과 협박을 하지 않고 제때 상환하지 못하는 채무자를 사기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다. 이후 경찰 수사를 협박 수단으로 삼아 고소 취하 비용 등을 요구하는 식이다.
부산 동래경찰서는 최근 1년간 상품권 예약 판매 수법으로 저신용자들에게 2억8000여만 원 상당의 불법 사채를 융통해 준 30대 남성을 지난달 구속했다. 경찰은 이 남성이 제출한 진정서를 들여다보던 중 그가 불법 사채업자임을 알아채고 수사 방향을 바꿨다. 류승훈 동래서 수사과장은 “불법 사채 피해자 중에는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질까 봐 겁먹고 업자의 말에 휘둘린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 “상거래 아닌 불법 사채”… 첫 법원 확정 판결
다만 이런 변종 불법 사채임에도 불구하고 상품권 예약 판매는 ‘개인 간 거래’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대부업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기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상품권 불법 사채 피해가 늘면서 최근 이를 불법 사채로 규정해 엄단하는 확정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부산지법은 상품권 예약 판매 수법으로 연이율 최고 2655%를 요구한 박모 씨에게 대부업법 위반죄를 인정해 지난달 28일 2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장래에 일정한 액수를 돌려받을 것을 전제로 돈을 준 것은 명백한 대부 행위”라고 판단했다. 박 씨는 상고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같은 날 김모 씨(32)도 연이율 최고 3870%를 요구한 죄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은 뒤 형이 확정됐다. 재판부는 “취약 계층을 상대로 고리의 불법 사채를 굴리고 변제 압박을 하려고 무고까지 하는 유형의 범행을 막기 위해 엄벌이 필요하다”고 판시했다.
단속의 사각지대를 찾아 움직이는 불법 사채에 대해 사법부가 첫 판단을 내리면서 수사기관도 수사와 단속에 본격적인 속도를 낸다는 계획이다. 불법 사채 사건 등을 맡고 있는 경찰청 관계자는 “기존에는 법리적인 문제로 대부업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기 어려웠는데, 재판부의 첫 판단이 나온 만큼 세부적인 수사 지침 마련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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