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중을 긁적거리며[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0〉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중략)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심보선(1970∼)




이 시는 세로 20.5cm, 가로 12.5cm의 시집 속에 들어 있다. 대개 시집의 판형은 책 중에서도 좀 작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네 페이지 빼곡하게 이 시는 적혀 있다.

시집의 크기는 두 손바닥으로 가리면 다 가려진다. 그와 비슷한 크기, 그러나 우리가 더 자주 가리는 것 중에 얼굴이 있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쌀 때는 혼란스럽고 괴로울 때다. 그럴 때는 손바닥 안으로 도망치지 말고, 얼굴을 감싸던 손을 들어 시집을 열어 보는 것도 좋다. 시인의 언어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는 것이 퍽퍽할 때, 타인 때문에 힘들 때, 사실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에 힘들다는 것을 직감할 때 나는 이 시가 알려주는 비밀에 기대어 위로를 받는다. 시인은 우리 인중이 천사의 손가락 모양이라고 알려준다. 쉿, 다 잊고 다시 시작해. 이런 운명의 자국을 보고 있자면 자잘하게 흔들리는 마음은 좀 진정된다.

손을 들어 잊었던 인중을 다시 한 번 쓸어본다. 천사의 약속과 지워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눈을 들어 마주한 사람의 인중을 바라본다. 우리는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구나 싶어 미워할 수 없다. 세로 20.5cm, 가로 12.5cm의 세계는 참 놀랍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인중#시집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