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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민간유일 北인권백서, 올해는 왜 못 보나[광화문에서/윤완준]

입력 2021-08-11 03:00업데이트 2021-08-1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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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준 정치부 차장
1993년 윤여상은 스물일곱 대학원생이었다. 탈북민 정착 과정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전국을 돌며 탈북민들을 인터뷰했다. 탈북민들이 그에게 들려준 얘기는 예상과 달랐다.

그들은 북한에서 겪은 참혹한 인권 유린을 증언했다. 그는 탈북민들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는 걸 봤다. 공포로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일들을 어느 젊은 연구자가 기록함으로써 언젠가 진실이 규명될 수도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을 얘기했다고 한다. 1994년 윤여상은 북한 인권 침해를 기록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의기투합한 연구자들은 5명. 1999년부터는 그해 처음 문을 연 탈북민 정착기관 하나원에 입소한 탈북민을 직접 인터뷰했다.

이들은 불행한 과거를 정의와 존엄이라는 이름으로 청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의 인권 침해를 체계적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통일 이후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역사적 단죄도 어렵다고 여겼다.

2003년 북한인권정보센터(NKDB)가 설립됐다. 한국 최초의, 북한 인권을 기록하는 비정부기구(NGO)였다. 2007년, 13년간 축적된 기록을 바탕으로 첫 북한인권백서가 나왔다.

당시 NKDB가 기록한 북한 인권 침해 데이터베이스는 6878건. 14년 뒤인 현재 NKDB가 확보한 데이터베이스는 12만7620건에 달한다. 한국에 입국한 하나원 입소 탈북자들을 매년 꾸준히 인터뷰해 기록한 결과다.

NKDB의 설립 모토는 ‘정치적 중립’이다. 오로지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인권 실태를 기록하겠다는 것. 정권에 따라 북한 인권 실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겠다는 것. 그래야 국제사회에서 가치 있는 자료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NKDB에는 연구원들이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내부 규정이 있다. 연구원들은 서약서를 써야 한다.

마이클 커비 전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위원장은 NKDB 백서에 대해 “단순한 통계 조사가 아니다. 북한 주민의 인권을 옹호하고 보장하는 소명”이라고 했다.

그런 NKDB가 9일 보도자료를 내고 “올해 북한인권백서를 내지 못한다”고 밝혔다. 1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해 하나원 입소 탈북민 조사를 못 했기 때문이다. 통일부는 지난해 NKDB에 조사 대상 탈북민 수를 줄이라고 요구하다가 조사를 막았다. 그 과정이 석연치 않다. 통일부 소속 북한인권기록센터는 2017년 출범 이래 올해까지 단 한 번도 인권 침해 기록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NKDB의 북한인권백서는 2014년 COI 보고서는 물론이고 매년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 서울 유엔 북한인권사무소 등의 북한 인권 실태 조사에 인용돼 왔다. NKDB 윤여상 소장은 “남북 관계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정치 권력에 따라 북한 인권이 정치화되는 모습에 연구원들이 충격을 받았다”며 “북한 인권 문제를 정부가 독점하면 안 된다는 점을 더더욱 깨닫고 있다”고 했다. “북한 주민의 인권을 옹호하고 보장하는 소명”의 백서가 내년 다시 세상에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윤완준 정치부 차장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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