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원수]아이들에게 빚 떠미는 유일한 나라

정원수 사회부장 입력 2021-05-31 03:00수정 2021-05-3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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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청년에게 과한 빚 상속은 위헌” 법 바꿔
한국, 대법 판결로 국회가 이달 법 개정안 발의
정원수 사회부장
A 씨가 여섯 살이던 1993년 아버지가 숨졌다. A 씨의 어머니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 아버지가 B 씨에게 갚아야 할 약속 어음 1210만 원을 자녀와 함께 자동 상속받았다. A 씨는 성인이 된 2017년 8월 B 씨가 자신의 은행 계좌 등을 압류하자 재산보다 많은 빚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게 된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A 씨는 다음 달 상속재산을 초과하는 상속채무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정승인’ 신고를 하고, B 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 2심에선 A 씨가 승소했다. 2019년 5월 대법원에 접수된 A 씨 사건은 대법관들의 견해차로 소부(小部)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지난해 1월 전원합의체에 회부됐다.

상속인이 미성년자일 경우 법정대리인과 미성년자 중 누구를 기준으로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하는 사실을 알게 된 때로 해석해야 하는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김재형 대법관 등 다수의견은 A 씨의 법정대리인인 어머니가 민법상 한정승인 신고기한(3개월)을 놓쳤기 때문에 미성년자라고 해서 예외로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민유숙 대법관 등 반대의견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정승인 기한을 놓친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지난해 11월 대법원 전합은 다수의견(9명)이 반대의견(4명)을 앞서 하급심을 뒤집었다.

대법원에선 ‘법적 안정성이 우선’이라는 사법소극주의자와 ‘적극적인 법 해석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법적극주의자 사이에 가장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판결로 꼽힌다. 그런데 다수와 반대 의견 모두 민법 개정의 필요성엔 공감했다. 반대의견은 “청년세대가 빚의 대물림으로 출발점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하지 않도록 사회가 노력하여야 한다”고 했다. 다수의견도 “반대의견의 문제의식에 충분히 공감한다. 미성년자를 보호할 수 있는 특별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입법론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했다.

대법원은 46쪽 분량의 판결서 38, 39쪽에 이례적으로 한국과 가장 유사한 상속 제도를 갖고 있는 해외 입법 사례를 상세하게 적었다. 사실상 입법 모범답안을 제시한 것이다. 프랑스는 미성년자가 한정승인만 가능하고, 상속재산이 채무를 초과하는 명백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법원의 허가를 얻어 빚을 승계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은 1998년 민법을 개정해 미성년자는 상속채무에 대한 책임을 그 미성년자가 성인이 된 시점에 가진 재산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앞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자녀가 상당한 채무를 부담한 채로 성년의 삶으로 방출되는 것은 자녀의 인격권에 반하는 위헌”이라며 입법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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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씨와 똑같이 1억 원 이상의 빚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김유철(가명) 군과 그의 어머니 도모 씨. 그들은 ‘빚더미 물려받은 아이들’을 취재하던 동아일보에 자신의 사연을 공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파산했지만 같은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법을 꼭 바꾸고 싶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올 4월 해외 입법 사례를 바탕으로 미성년 상속인 보호 입법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 보고서를 본 국회의원들이 미성년자는 상속채무가 상속재산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프랑스, 독일 같은 민법 개정안을 10일 발의했다. 아이들이 재산보다 많은 빚을 물려받는데도 보호 장치가 전혀 없는 나라, 그 아이들이 청년이 되면 신용불량자로 사회생활을 하라고 강요하는 유일한 나라라는 오명에 국회가 이제 답해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미성년자#빚#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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