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손효림]쓸모 있어야 살아남는 시대, 無用해도 의미 있는 걸 찾아

손효림 문화부 차장 입력 2021-03-22 03:00수정 2021-03-22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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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수컷은 쓸모가 없어. 알도 못 낳고 맛도 없어. 그래서 버려지는 거야. 버려지지 않으려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지?”

영화 ‘미나리’에서 제이컵(스티븐 연)은 수컷 병아리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연기를 가리키며 뭔지 묻는 아들 데이비드(앨런 김)에게 말한다. 미국에 이민 온 제이컵은 병아리 감별소에서 암컷을 골라내는 일을 한다. 아빠 말이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비드의 천진한 얼굴과 제이컵의 진지한 표정은 존재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비정한 현실을 또렷하게 일깨운다.

제이컵이 아내 모니카(한예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칸소주의 허허벌판을 필사적으로 일궈 농장을 만들려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아이들에게 뭔가 해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거 아니야!”라는 제이컵의 외침에는 간절함과 초조함이 배어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예루살렘히브리대 교수는 이 시대 인간에 대해 ‘쓸모 있다(useful)’, 혹은 ‘쓸모없다(useless)’는 판단을 내리는 건 경제 시스템이라고 진단했다. 인간이 하는 특정한 일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지 역시 경제 시스템이 결정한다는 것. 우리는 그 거대한 바퀴 아래에서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치고, 불안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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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50대 외벌이 가장은 집에서 아내, 딸과 거의 대화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내와 딸은 친구처럼 온갖 이야기를 하지만 그가 끼어들 틈은 없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그는 아내, 딸과 나눌 이야깃거리가 없다고 한다. 그는 “나는 월급을 갖다 주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퇴직하면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거다”라고 씁쓸히 말했다.

경제적 성취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절대 기준일까. 모두가 이에 동의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달 15일로 30주년을 맞은 학전소극장의 김민기 대표는 어린이극을 만드는 데 공들인 지 오래됐다. 어린이극은 공연계에서도 ‘돈벌이가 안 되는’ 분야 중 하나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가수 김광석의 1000회 공연으로 유명한 학전소극장에 줄곧 어린이극을 올리는 이유에 대해 김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극일수록 잘 만들어야 한다. 처음 접하는 공연의 수준이 높아야 공연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자라서도 좋은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먼 미래를 내다보며 묵묵히 씨를 뿌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외진 골목에 작은 책방을 낸 이는 “계산기를 두드리면 답이 안 나오지만 좋아하는 일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김민정 시인의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은 제목에 이끌려 샀다는 독자들이 많다. 쓸모를 강조하는 세상을 향해 대놓고 반기를 든 이 감각적인 제목에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아닌가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

돈의 가치가 다른 가치들을 집어삼키는 속도가 숨이 찰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 이런 세찬 흐름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들이 존재하기에 세상에 숨 쉴 만한 곳이 있는 게 아닐까.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수컷#미나리#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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