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부부상담하듯 위안부합의 중재”… 한일관계 개선 압박할듯[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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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갈등 ‘바이든’ 새 변수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 세워진 고 배춘희 할머니 등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자들의 흉상. 동아일보DB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 세워진 고 배춘희 할머니 등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자들의 흉상. 동아일보DB
최지선 정치부 기자
최지선 정치부 기자
“한일관계가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요즘만큼 어려운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최근 한일관계에 대해 양국 외교가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평가다. 지난달 8일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 우리 법원이 일제강점기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라 상징성이 크다.

하지만 2018년 10월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과 이에 따른 일본의 수출 규제로 악화된 한일관계 개선을 지난해 말부터 시도하던 청와대는 당황하는 모습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하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신년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해 이례적으로 “곤혹스럽다”고 밝힐 정도다. 이런 가운데 국방부는 2일 발표한 ‘2020년 국방백서’에서 일본을 “협력해 나가야 할 이웃 국가”라고 기술했다. 2018년 백서에서 ‘가까운 이웃이자 협력해 나가야 할 동반자’라고 한 것과 비교하면 표현이 격하됐다. 한 일본 소식통은 “그나마 이웃이라고 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외교부 당국자들 역시 “관계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 해법을 둘러싼 양국 간 견해차가 크다”면서 협의가 난항을 겪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 강제징용 ‘정치적 해결’에 한일 간극 커


지난달 부임한 강창일 주일 대사는 출국 전 기자간담회에서 “한일관계가 국교 수립 이후 최악이다. 역사 갈등 문제는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정리해본 강제징용 해법만 12개가 넘는다”고도 밝혔다. 법원이 강제징용과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승소 판결을 내린 것과는 별개로 한일관계를 고려해 역사 갈등에 대한 ‘정치적 해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정부가 공개적으로 ‘정치적 해결’을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우리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방안이 거론되는 건 한일 양국이 합의할 만한 결정적 방안이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최근 한일 외교가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정치적 해법은 이른바 ‘변제안’이다.

우리 대법원은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이 기업들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하고 매각하는 절차를 통해 현금화하면 피해자들에게 배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기업 자산을 현금화할 경우 한일관계가 파탄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기업이 일단 판결에 따라 배상하고 한국 정부가 나중에 보전하는 방안이 떠올랐다. 하지만 일본은 이 안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일본 기업이 일단 배상을 하면 일제강점기 때 피해를 입은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하게 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배치된다는 주장이다.

절충안으로 한국 정부나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먼저 지급하고 일본에 나중에 배상금을 청구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 대신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면 일본이 한일관계의 ‘레드라인’이라고 주장한 일본 기업 자산의 강제 매각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수혜를 본 포스코 등 한국 기업이 기금을 만들어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대신 지급하고,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안이 절충안으로 가장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대위변제’(제3자가 우선 갚은 후 채무자에 대해 구상권을 취득) 안이다.

하지만 이 경우 피해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을 정확히 따른 것이 아니라 향후 분쟁의 여지가 있다. 우리 정부가 나중에 일본 기업에 배상금을 청구했을 때 일본이 받아들일지도 미지수다. 일본 역시 한국에 외교적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이 방안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고 한다.

이후 양국 간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자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이 지난해 10월 일본을 방문했다. 김 회장은 올해 도쿄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배상 문제를 한시적으로 동결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봉합이 아니라 일본 기업 자산을 압류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며 거부하고 있다. 이 방안은 정치가 사법 영역에 개입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한국 정부는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면서도 ‘자국 기업은 건드리지 말라’는 일본 정부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 바이든 행정부 출범에 정부 태도 급변


최근 일본에 대한 우리 정부의 태도는 사뭇 달라졌다. 외교부는 지난달 8일 위안부 피해자 승소 판결이 난 뒤 6시간 30분 만에 세 줄짜리 대변인 논평을 내놨다. 눈에 띄는 것은 “2015년 12월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한다”는 부분이다. 청와대는 장고 끝에 이 부분을 논평에 포함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2015년 위안부 합의가 공식 합의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 토대 위에서 이번에 판결을 받은 피해자 할머니들도 동의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협의를 해 나가겠다”고 했다. 2015년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는 일본의 주장을 원칙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강창일 대사는 지난달 취임하며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낸 출연금 10억 엔(약 106억 원)을 위안부 피해자 배상에 활용하는 안을 언급했다. 강 대사는 “(현재 보관 중인) 일본 정부의 위안부 재단 기금을 합쳐 양국이 새로운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낸 기금 10억 엔 가운데 배상과 운영비 등을 제외하면 6억 엔가량이 남아있다.

정부의 태도가 급변한 데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다. 바이든 대통령은 4일 취임 후 문 대통령과의 첫 통화에서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동맹을 복원하고 중국 압박 기조를 유지하려는 미국 입장에서 한미일 협력은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한일관계 개선을 압박하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바이든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부통령 시절이던 2015년 위안부 합의를 막후에서 중재한 경험이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당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부부관계를 복원시키는 이혼상담사 같았다”고 회고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위안부 합의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는 만큼 우리 정부가 이를 부정하면 한미일 협력 지형에서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발 빠르게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전에 나서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는 지난달 28일 바이든 대통령과 첫 통화에서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의견교환을 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했다. 일본 소식통은 “우리는 미국에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무시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이 중간자적 입장을 취한다면 한국 편을 드는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1951년 일본의 주권 회복을 결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근거라고 본다. 한국이 한일협정을 건드리면 미국이 참여한 샌프란시스코 조약까지 흔들린다는 논리다.

○ 피해자와 대화 제대로 되고 있나


외교 지형이 바뀌고 다양한 정치적 해결 방안이 나와도 일본의 반성, 사죄와 함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의 의사다. 한일 양국 정부가 어렵게 합의한다고 해도 피해자들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향후 똑같은 갈등이 반복될 수 있다. 일본이 한국에서 거론되는 여러 방안에도 쉽게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한일관계가 공전하는 동안 우리 정부가 피해자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 소식통은 “정부 당국자들은 물론 정계 인사 누구도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만나지 않는다. 어떤 안을 내놔도 비판받을 구석이 있기 때문에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피해자들과 대화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외교 당국자는 “피해자들 의사는 다양한 경로로 전달받고 있지만 개개인이 원하는 해결 방식이 다 다르다”고 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우리 정부가 피해자 배상 방안에 대한 입장을 먼저 명확히 정리해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피해자들과 소통하면서 국내적 합의를 먼저 이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의 사과와 배상금을 받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과거사를 어떻게 치유해 나갈 것인지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최지선 정치부 기자 aurin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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