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승이냐” “헌정이다!” 트리뷰트 밴드의 설움[임희윤 기자의 죽기 전 멜로디]

임희윤 기자 입력 2021-01-22 03:00수정 2021-01-22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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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록 밴드 펄 잼의 2013년 공연 모습. 드러머 맷 캐머런(오른쪽)은 열세 살 때 밴드 ‘키스’의 트리뷰트 밴드에서 활동하며 키스 멤버와도 교류했다. 그 밴드는 얼마 안 돼 키스 측으로부터 퍼블리시티권 침해 경고를 받고 해산했다.
임희윤 기자
D의 이어폰 줄은 귀에서부터 늘어뜨려져 주머니 속 워크맨에 연결돼 있었다. 그 하얗고 기묘한 링거는 시뻘겋게 생동하는 생명의 링거액을 중력을 거슬러 꿀렁꿀렁 D의 뇌에 주입하고 있었다. 약동하는 드럼과 절규하는 보컬…. 난생처음 맛보는 전압에 취해 D는 자신을 가둔 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Oh I oh I‘m still alive…’(‘Alive’ 중)

그 앨범의 다음 곡은 하필 ‘Why Go’. 정신병원에 자신을 가두고 떠난 모친을 원망하는 ‘Why go home?’의 사자후가 후렴구다. D는 앞에 놓인 벽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학교생활의 최대 금기, 월장이었다.

1#. 20년 전 일을 D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Why go home?’의 가사가 복선이었을까. 다음 날 D는 담임선생님께 ‘왜 (무단으로) 집에 갔냐’는 추궁을 받으며 매를 맞았다고 한다. 미국 록 밴드 펄 잼(Pearl Jam)의 ‘Ten’(1991년) 앨범이 그날 틴에이저 D에게 끼친 이 이상한 화학반응을, 심신을 리듬에 저당 잡혀 본 적 있는 음악 팬이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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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90년대를 풍미한 밴드 펄 잼이 최근 오랜만에 음악 팬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밴드 이름에 소문자 ‘m’을 더해 활동 중인 영국의 트리뷰트(헌정) 밴드, ‘Pearl Jamm’에게 변호사 명의로 경고장을 보낸 것이다. 요는 유사한 팀명 탓에 펄 잼의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끼치고 있으니 당신들 밴드의 이름을 펄 잼의 노래나 앨범 제목 따위로 바꾸라는 압박이다.

#3. 지구상에는 수많은 트리뷰트 밴드가 활동 중이다. 때로 대중은 잘 몰라줘도 미지의 해저 생물처럼 끈질기게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들만의 생태계를 조직한다. 호주에는 스웨덴 그룹 ‘아바’의 음악을 재현하는 ‘Bj¨orn Again’이 있다. 아바 멤버 비에른 울바에우스와 부활 메시지를 뒤섞은 작명. 미국에는 호주 밴드 ‘AC/DC’를 흠모하는 ‘AC/Dshe’와 ‘AZ/DZ’가 존재한다. 비틀스의 영광을 기리는 ‘The Buggs’와 ‘The Fab Faux’, 블랙 사바스를 추앙하는 ‘Bat Sabbath’, 듀란듀란의 여성 버전 ‘Joanne Joanne’도 있다. 드레드록스(자메이카 흑인들이 주로 하는 땋은 머리)를 한 채 ‘레드 제플린’을 레게로 재해석하는 ‘드레드 제플린’, 비틀스와 메탈리카의 음악을 창의적으로 융합하는 ‘Beatallica’도 엄존한다.

#4. 펄 잼 변호사의 편지를 받은 ‘Pearl Jamm’ 멤버들은 즉각 반발했다. 원조 펄 잼의 멤버들도 우리의 존재를 진작에 알고 있었으며 우리는 펄 잼의 음악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 왜 하필 전염병으로 음악계가 신음하는 시기에, 그것도 변호사 명의로 협박조의 메일을 보냈냐는 것이다. ‘Pearl Jamm’의 페이스북을 살펴보면 실제로 그들이 원조 펄 잼 멤버의 생일, 2집이나 4집의 발매일에 축하 게시물을 올리고 새 앨범이 나오면 홍보까지 해주는 충실한 활동을 꾸준히 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를 노래로 대변하고 상업 거인에 맞서며 활동한 대표적 밴드인 펄 잼에 실망했다. 변호사에게 악역을 맡기지 말고 직접 이야기해 달라. 그러면 물러설 용의가 언제든 있다’고도 덧붙였다.

#5. 우리의 ‘Pearl Jamm’은 얼마 뒤 결국 물러섰다. 팀명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노래나 앨범 제목을 택하지는 않았다. 영세한 트리뷰트 밴드이지만 만만치 않은 강단은 ‘Pearl Jamm’의 새 간판에서 엿볼 수 있다. 밴드는 20일(현지 시간) 페이스북을 통해 새로운 그룹명을 공개했다. ‘LEGAL JAM(합법적 잼)’이다.

#6. ‘Pearl’과 ‘Legal’로 글자 수와 운율은 맞추되 변호사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으며 ‘합법’이란 항변까지 담은 절묘한 작명이다. 심지어 여덟 글자 모두 대문자로 박았다. 이런 해외 토픽을 서두에 언급한 질주 청년 D에게 전했더니 좋아한다.

“리걸 잼 너무 좋다. 같이 좀 잘 삽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스타들의 너무 긴 공백은 팬들을 힘들게 한다. 그들 대신 오늘도 무대에 올라 다른 이를 연기하는 지구상의 ‘리걸 잼’ ‘비에른 어게인’ ‘에이시디쉬’ ‘조앤 조앤’들을 응원한다. 단, 타인의 고귀한 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편승#헌정#트리뷰트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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