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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열두 달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포도나무 아래서/신이현]〈67〉

신이현 작가
입력 2020-11-24 03:00업데이트 2020-11-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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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밭에 뱀들이 자꾸 보였다. 무슨 불길한 징조인 건 아닌지, 겁을 먹고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겨울잠 들기 전에 영양분 축적을 위해 먹이 사냥을 나온 것이라고 했다. 독이 바짝 올라있으니 조심하라고들 했다. 동네 밭 여기저기에서 똬리를 틀고 머리를 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곧 추위가 닥친다는 뜻이지. 스윽 피해 다니면 괜찮아.” 동네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레돔은 장화를 신고 밭을 갈았고 호밀과 보리, 밀, 유채 씨앗을 뿌렸다. 뱀도 인간도 다 같이 겨울 채비 중인 것이다. 씨를 뿌리고도 비가 오지 않아 걱정을 했다. 먹이 찾는 뱀처럼 농부도 한 줌의 가을비를 기다리며 목이 탔다. 안 죽을 만큼 애를 태우더니 비가 내렸다. 아주 세차게 내렸다. 즉시 호밀과 보리 씨앗이 푸르게 쑥쑥 올라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추워졌다. 뱀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어디선가, 안락한 곳에 웅크려 잠을 자고 있겠지. 이런 계절에 밭에 가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화면으로 보는 것만 같다. 일 년 열두 달 중 아름다운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뭇잎은 모두 떨어져 버렸고 뱀은 허물을 벗어 버렸다. 어디선가 날아와 꽃이 되었던 코스모스는 죽기 전에 실컷 씨를 흩어지게 했고 무는 터지도록 통통하고 배추도 알이 꽉 찼다. 무가 뽑혀 나간 땅속의 미생물들은 얼었다 녹았다 해도 죽지 않고 살아날 준비에 들어갔을 것이다. 사람들은 배추밭에서 김장을 하고 식구들이 통을 가져와서 나눠 간다. 겨울 채비를 하는 사람들의 옷자락은 분주하지만 눈길은 설레고 웃음이 터진다. 이제 곧 따뜻한 방에서 아삭한 김치와 고기를 먹는 겨울이 될 거야. 행복이란 그런 것이지.

친정 엄마는 이국 만 리 동갑내기 사돈을 걱정한다. “올해는 김장김치를 좀 보내주고 싶다. 묻어두고 겨울 내내 밥이랑 먹으면 마누라 없어도 그렇게 쓸쓸하지는 않을 거다.” 친정엄마에게 김치는 남편 없어도 외롭지 않게 겨울을 날 수 있는 음식이다. 친정어머니와 시아버님은 프랑스에서 한 번 한국에서 한 번,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동갑내기가 가진 정서는 나라를 막론하는 모양이다. 아버님도 이때쯤이면 겨울 채비를 시작한다.

“알자스 겨울 빵을 만들려고 한다. 너희들한테 모두 세 개 보낼 테니 어머니께도 하나 주렴.” 눈이 많이 오는 지방인 알자스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말린 과일을 잔뜩 넣은 알자스 빵을 식구 수대로 구워서 겨울 내내 뱅쇼와 함께 먹는다. 예전에는 양배추 김치를 담가 지하실에 저장하고, 돼지를 잡아 소금에 절였다. 돼지 부산물들은 갈아서 창자에 넣어 훈제를 해서 말렸다. 와인까지 창고에 잔뜩 쟁여두고 크리스마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 많은 왕겨와 낙엽과 깻단은 언제 다 뿌리지?” 포도밭 겨울 채비를 위해 구입한 10t 왕겨가 한 산이고, 가을 내내 주워 온 낙엽도 한 산이고 온 동네에서 끌고 온 깻단도 한 산이다. 우리는 아직도 일을 끝내지 못했고 겨울로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린 포도나무가 얼어 죽을까 봐 걱정이다. 레돔은 자루에 왕겨를 퍼 담아 어깨에 짊어지고 간다. 낙엽 포대기도 어깨에 짊어지고 가서 포도나무 아래 이불처럼 듬뿍 덮어준다. 저러다 허리가 꼬부라져 붙어 버리겠다. 머리를 세우는데 어디선가 양 울음소리가 들린다. 어디인가 싶어 보니 레돔의 머리에 양이 세 마리 붙어 있다. 곱슬머리가 얼마나 길어 버렸는지, 정수리와 양쪽에 양이 붙어 있는 것만 같다. “아무리 바빠도 머리카락은 좀 정리하고 살자.”

나는 그를 데리고 미용실에 간다. 양털 머리카락을 자르니까 예전의 직장인이 된 것처럼 말끔해졌다. 스카이프 통화를 하면서 시아버지가 아들의 말쑥한 모습을 보고 좋아한다. 다음 주엔 알자스 겨울 빵이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엄마의 김장김치도 오겠지. 나는 무엇을 보내야 하나. 햇생강을 잔뜩 사두었으니 생강 졸임이라도 해야겠다. 시아버님은 생강 졸임을 먹으며 양털머리 아들과 생강처럼 매운 며느리를 생각할 것이다. 생강에 설탕을 넣어 졸이니 콕 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땅속의 뱀이 콧잔등을 실룩이며 눈을 뜰 것만 같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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